"깨달음, 21세기의 문화현상"
깨달음은 이제 문화여야 한다. 그 길로 들어서고 있다.
틸리히는 문화와 종교를 인간 삶의 두 축으로 설정했다. 이 구조 속에서는 문화가 물으면 종교는 대답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것은 고전적인 스승-제자의 관계다.
오늘날의 깨달음은 이제 여기에서 벗어난다.
깨달음은 문화 속으로, 저잣거리 속으로 들어가, 문화와 일체화된 속에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
이것은 지옥으로 내려가 지옥과 동화되어 지옥을 꽃밭으로 바꾸어내는 지장보살의 비유다.
사실 그렇게 비장한 속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문화를 가장 고급스럽고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즉 문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문화 중의 문화, 그 중추로 기능한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문화중심부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깨달은 이들의 운동방향성이다. 이들은 과거와는 달리 '스승(master)'이 아니라 '안내자(sherpa)'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안내자보다는 조금 가벼운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명명해보자면 '깨달음 커뮤니케이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내자는 사람들과 함께 직접 문화의 중심부를 향한다면, 깨달음 커뮤니케이터들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파하는 역할을 맡는다.
깨달음 커뮤니케이터들이 스승을 사칭할 때 곧잘 야기되곤 하는 것이 사이비 현상이다. 휴대폰 대리점의 판매사원이 스티브 잡스의 권위를 가지려는 일과 같다. 그러지 말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폰을 좋아할 수 있도록 도우면 된다. 깨달음 커뮤니케이터들도 그러한 아름다운 사명 속에 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처럼 '깨달음의 탈신비화'이다.
깨달음은 더는 특정종교의 전유물이나, 이상심리학적 체험의 양상이나, 오컬트적 권위의 소재가 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실제로 깨달음은 수상한 것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깨.달.음.은. 사.실. 중.의. 사.실.에. 대.한. 체.험.이.다.
중력보다 더 당연하게 느껴지는 아주 사실적인 것이다. 그것을 그동안 잊고 살았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사실이다.
깨달음은 이야기가 아니며, 특히 판타지적인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자기를 벗어난 인식이나, 메타인지, 거시적 자기객관화 등과 같은 인식론적 요소 또한 아니다. 그런 것은 일종의 유사종교체험(또는 매슬로의 표현에 따르면 '쁘띠절정체험')은 될 수 있겠지만, 깨달음과는 상관없다.
깨달음은 굳이 얘기하자면 존재론이다.
그러나 없음의 존재론이며, 공(空)의 존재론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인식될 수 없으며, 지혜로 직관될 수만 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실은 아무 의미도 없다. 말하면 말할수록 더 바보같아진다. 이것은 깨달음을 언술화하려고 할 때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이렇게만 말해두자.
깨.달.음.은. 새.로.운. 문.화.다.
인류가 분명 아주 오래 전부터 즐겨왔지만, 그리고 인류의 모든 즐거움이 그 위에서 펼쳐질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즐거움이었지만, 그 사실을 망각해왔던 바로 그러한 문화다.
다시 찾은 우리에게는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문화로 느껴진다.
문화란 삶을 직조하는 형식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그 내용이다.
깨달음은 '즐거운 삶'을 창출해내는 문화양식이다. 니체의 철학은 깨달은 이들이 살아가는 이 문화양식을 한결같이 묘사해낸다. 그것은 한량없는 삶의 기쁨이고, 기쁨이며, 또 기쁨이다.
태어나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를 전율케하는 영원의 기쁨이다.
깨달았다는 것은 바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매일 꿈꾸어 바라지 않았던 그 현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것만을 소망했다.
바로 이렇게 살 수 있기만을 소망해왔다.
그리고 이제 가능하다.
여러분의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그 삶의 방식,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기로 사회적으로 합의했다.
깨달음, 그것은 당신과 나의 사회적 약속이다.
같이 영영 누리자고 우리는 뜨겁게 악수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