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통해 노는 자, 언어를 통해 지배하는 자"
너무나도 단순하게, 실존은, 곧 사실적인 우리 존재는 언어보다 앞서 있다. 우선한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는 이처럼,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임의로 규정하고 있는 그 어떤 언어보다도 사실적인 우리 자신이 더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곧, 우리는 그 어떤 언어에도 제약될 수 없고, 구속될 수 없으며, 지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다. 그래서 실존은 자유다.
그러나 우리가 쉽사리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 언어라고 하는 것을 과잉되게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언어를 마법적인 것으로 우상화해왔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어적 문법으로 이루어져 있고, 때문에 그 핵심을 관통하는 언어를 익히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우리가 언어를 우상화하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작동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분명 언어적 문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상은 허구의 세상인 까닭이다.
흡사 영화와 같다. 영화를 구성하는 문법을 잘 파악하면, 영화를 만들고, 편집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꿈 속에서는 다 가능한 법이다.
아무리 마법적으로 잘 조직된 언어라 할지라도, 언어가 만들어내는 현실은 언제나 가상현실일 뿐이다. 허구의 현실일 뿐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조차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현실은 전부 다 허구의 현실인 까닭이다.
우리는 언어 없이는 살 수 없다. 때문에 언어로 구성된 문화, 사회, 경제적인 모든 현실이 필연적으로 허구의 현실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는 허구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언어로 만들어진 허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사는 것과, 이 모든 것을 진짜라고 믿으면서 그 안에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을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갈 때, 우리는 더 권위있고 효율적인 언어를 축적해 힘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고자 한다. 이른바, 레고로 만든 성의 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곧,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언어는 타락한다. 인간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전락한다.
언어의 우상화라는 것은 곧 언어의 실체화를 의미한다. 이를 아주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특정한 언어를 익혀 이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 그 언어에 대응되는 존재가 우리에게 복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정의라는 언어를 입에 달고 살면, 우리 자신이 마치 정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만의 꿈 속에서 사는 모습과도 같다. 언어를 우상화한다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자폐의 현실을 낳는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이 자기만의 꿈이라는 것을, 자폐라는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을 때, 그 현실은 이제 타자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외부로 확장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채택한 특정한 언어를 진정한 언어라고 믿으며, 스스로 부여한 그 언어의 권위를 통해 타자를 지배하고, 통제하며, 남용하려 하게 된다.
이른바, 진리의 이름으로 투쟁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진리의 문제가 아니며, 그저 자기가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자기의 언어가 최고의 언어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우상숭배의 문제일 뿐이다. 이는 아주 쉬운 예로는, 자기 아버지가 최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며 반 아이들 또한 자기 아버지를 최고의 아버지로 인정하게 하기 위해 싸우는 초등학생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몰락이다. 언어가 고작해야 초등학생의 권력싸움을 위해 봉사하는 저렴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성인처럼 몸만 큰 초등학생이 여전히 아버지를 찾을 때, 그 아버지의 대리물[로고스의 제공자]이 되어 "우리 아이가 최고야. 세상 다 우리 아이꺼."라는 유아적 수사학만을 성립시켜주기 위해 기능하는 하찮은 용법으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을 때, 분명 그 통찰은 탁월한 것이었다. 그는 언어를 통해 인간이 존재를 포섭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러나 그 포섭을 통해 오히려 인간이 포섭하지 못하는 더 큰 존재의 면모가 역설적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다.
즉, 언어는 존재를 개방하면서, 동시에 은폐하는 것이다. 때문에 언어는 바로 존재의 신비에 봉사하는 입장이 된다. 언어의 작용으로 인해 존재는 더 거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전문적 언어를 더욱 많이 취득할수록, 오히려 자신의 전문분야가 다루는 영역을 더욱 거대하게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우주를 연구하는 학자가 우주에 대한 언어를 더 많이 얻게 될 때, 그는 우주를 더욱 작게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전보더 더욱 거대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언어가 존재에 봉사할 때, 언어의 습득은 존재를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거대하게 개방하게 된다. 이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가 결코 우리에게 통제될 수 없는 더욱 자유롭고 멋진 이로 느껴지게 되는 현실과도 같다.
때문에 언어의 용법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향되어 있을 때, 언어는 지배적 도구로서 결코 행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는 인간의 자유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자유는 동시에 인간의 사랑을 드러낸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삶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삶의 아름다움을 더욱 개방하기 위해, 삶의 신비에 더욱 감동받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일종의 놀이로도 비유할 수 있다.
놀이라는 것은, 임의적인 시작과 끝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의 흐름을 즐기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경계가 있어야,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흐름을 포착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누릴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곧, 놀이는 개방하면서 동시에 은폐하는 언어의 속성을 그대로 닮아 있다. 모든 놀이가 언어적 문법, 즉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바로 이 놀이와 같다.
우리에게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명확한 경계가 있다. 그것을 유한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영원히 흐르는 삶이 정말로 흐른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그 삶의 영원한 흐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유한성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영원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삶은 바로 이러한 영원성을 즐기는 놀이다.
그리고 인간이 바로 그 놀이꾼이다.
놀이에는 지배자가 있을 수 없다. 누군가가 자기를 왕으로 주장하며 놀이에 개입할 때, 그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게 된다. 즐겁지 않게 된다. 놀이터에서 자기만 정의의 이름으로 그네를 독점하겠다고 떼쓰는 아이가 놀이터를 싸움터로 만드는 것과 같다. 싸움터에서는 모두가 피곤하게 착취되기만 할 뿐이다.
착취는 인간의 힘을 빼앗는 것이다. 힘을 빼앗긴 인간은 인간의 존재감을 잃고 몰락한다. 곧, 인간으로부터 인간이 아닌 것으로 소외된다. 소외는 차가운 것이다. 소외의 차가움 속에서 인간은 경직된다.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고통스러워진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마법같은 일이다.
영원의 놀이터가, 한순간에 고통의 감옥으로 뒤바뀐다.
언어를 통해 지배하려는 이들이 바로 이 마법사들이다. 고통의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위대한 언어의 마법을 통해, 자기 자신도 타인도 함께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언어를 통해 노는 이들이 위치한다. 그들은 마법사가 아니다. 그저 놀이꾼일 뿐이다. 그들은 언어로 구성된 이 세상이 허구라는 사실을 이해하며, 그러나 그 허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언어라는 허구적 도구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고 한다. 언어를 우상화하지 않으며, 즉 언어를 자기 위에 두지 않으며, 도리어 언어를 자기 아래에 두고서 그 언어 위에서 자유롭게 노닌다.
이것이 실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마법사처럼 특별한 것이 아니다. 태어난 그대로의, 주어진 그대로의, 있는 그대로의, 놀이꾼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다 이 놀이꾼이다. 삶을 언어로 지배하려고 하지 않을 때, 언어에 대한 우상적 광신을 포기할 때, 누구나 다 이 놀이꾼으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 선(禪)에서 묘사하는 현실과도 같다.
지배자는 착취한다. 착취함으로써 경직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한 자세로 움직이지 못하게 경직시키는 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우리가 어린 시절 체험한 체벌의 역사가 이미 증명한다.
그러나 놀이꾼은 지배하려 하지 않기에, 자기 자신도 타인도 착취하지 않는다. 놀이꾼이 지배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지배하면 놀이의 재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놀이꾼은 더불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현실을 바랄 뿐, 홀로 재미없게 지배하는 현실을 바라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이 정말로 인간(人間)다울 때, 곧 더불어 살 수 있는 '사이(間)의 존재'일 때는 바로 놀때다. 전력을 다해 놀 때다. 자유롭게 놀 때다.
자유롭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논다는 것은 흐름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흐름을 즐길 수 있는 이는 그 흐름과 하나가 된 이다. 파도와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파도를 탈 수 없는 것과 같다.
때문에, 영원한 삶의 흐름을 즐기는 이는, 그 영원과 하나가 된 이다. 영원 속에 있는 이다. 그렇게 놀이꾼은 영원의 담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자각한다. 두려울 것이 없어진다. 두려울 것이 없어지니, 지배할 것이 없어진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두려운 만큼 언어를 축적해서 아이언맨의 갑옷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하고서, 잘 노는 척 플레이보이를 흉내냈던 것이다. 그러나 갑옷을 입고 놀 수는 없다. 자기 혼자만 갑옷을 입고 농구게임에 참여하는 이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아무리 잘 봐줘도, 그것은 자기한테만 재미있는 독재의 게임이다.
우리는 아이언맨의 갑옷을 벗고, 맨몸의 인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다시 한 번, 그것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은 놀이꾼의 신성한 이름, 인간의 영원한 본성이다.
지배하지 않으며 다만 자유로울 뿐인, 저 장대한 하늘을 향한 알바트로스의 더 장대한 날개짓이다.
인간이여, 그대는 실존한다.
고로 인간이여, 그대는 좀 놀 수 있는 존재다. 언어의 허구성을 직시하며, 심지어는 실존이나 자유와 같은 언어조차도 허구라는 것을 이해하며, 그 모든 언어에 앞서서 이미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다.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존재다. 놀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인간이여, 우리 끝장나게 한번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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