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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Sep 25. 2019

실존과 몸

"몸은 최후의 술어다"



  최후라는 표현에는 최종, 최고, 궁극 등과 같은 결정적인 완성점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몸은 최후의 술어다."라는 말은 "몸은 모든 것을 완성시킨다."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몸에서 비롯하였고, 다시 몸을 향한다. 이것은 현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위대한 전환점이다.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온 정치, 경제, 학문, 예술, 종교 등과 같은 문화적 퇴적물들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답은 아주 단순했다.


  바로 잘 살기 위해서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우리가 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한다.


  그리고 잘 산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잘 몸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어떠한 삶도 몸을 떠나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몸이 곧 삶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발견이다. 현대를 개방하는 데 큰 몫을 한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같은 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이와 같은 한 목소리를 내왔다.


  과거에 우리가 정신 내지 영혼 내지 마음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실제로는 전부 다 몸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몸은 단지 물리적인 개별적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잘 산다는 것, 잘 몸한다는 것은, 단지 개인의 육체를 잘 가꾸고, 건강하게 만들며, 아름답게 꾸미는 일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운동을 하고, 미용을 하고, 이완훈련을 하고, 교정작업을 하고, 힐링활동을 하는 행위들을 통해 이상적인 개인의 몸을 실현하는 것이 몸 담론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육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체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고 하는 존재감에 대한 이야기다.


  실존은 사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실존은 그 자체로 몸을 지시한다. 그리고 실존에서의 몸은 이미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처럼 '세계 내 존재'다.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


  마르셀이나 메를로퐁티와 같은 실존적 신체현상학자들은 이를 직접적으로 다시 '세계 내 몸'이라고 묘사한다. 세계와 공속되어 통하는 나로서의 몸의 특성, 그것이 바로 신체성이다.


  '세계 내 몸'이라는 이 표현을 우리말의 언어유희로 풀어내자면, 이것은 세계 내(內)에 나라고 하는 몸이 있다는 표현을 넘어서, 세계는 내 몸이라는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정의는 곧 '세계 몸'이 된다.


  나는 몸이다. 나는 세계의 몸이자, 동시에 나의 몸은 세계다. 이미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개별적 육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행위들은 오히려 세계와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는 행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와는 상관없이, 또는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별적 육체를 성장 및 발전시키고자 하는 행위들은 그래서 그 자체로 한계에 직면한다. 애초 분리에서 출발한 까닭에, 필연적으로 분리의 결과인 소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신체성은 분명 내 몸에 대한 이야기지만, 역설적으로 내 몸을 잊는 것이다. 곧, 신체성은 개별적 육체에 대한 집착을 탈착하는 것이다.


  몸에 대한 철학적 명저인 『몸의 의미(The Meaning of the Body)』를 저술한 마크 존슨은 몸의 은폐성에 대해 말한다. 그 핵심은, 우리의 몸이 스스로 잘 작동하고 있을 때는 오히려 몸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왕은 왕이 있다는 사실조차 백성들이 모르게 되는 왕이라는 비유와도 같다.


  인본주의 심리상담의 창시자인 로저스를 비롯하여, 인본-실존주의 계통에 속하는 심리학자들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 몸의 자율성을 신뢰한다. 인위적인 개입과 통제를 하지 않아도, 자기은폐 속에서 스스로 잘 작동하는 이 유기체적 신체에 대한 신뢰가 이들의 상담 작업의 핵심적인 근거가 되어준다.


  우리가 몸을 신뢰하지 않을 때, 아니 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것의 자율성을 신뢰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서 반드시 표현되는 언어의 구조가 있다. 그 문법은 이러하다.


  '신은 전능해야 한다.'

  '몸은 편안해야 한다.'

  '깨달음은 온화해야 한다.'

  '붓다는 현명해야 한다.'

  '사람은 착해야 한다.'


  곧,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지 못하는 그것을 반드시 주어로 삼아 표현한다. 그리고는 술어를 통해 그 주어를 제한하고자 한다. 신뢰하지 못하는 까닭에, 술어를 조건화함으로써 주어로 만든 그것을 규정하고, 통제하며,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 주인공의 자격을 임의로 조건지음으로써 자식을 구속하는 현실과도 유사하다. 아니 비단 부모와 자식 관계뿐만이 아니다. 애인 사이에서도, 배우자 사이에서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정치적 구조 속에서도, 이러한 조건화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로저스는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소외의 고통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조건화 때문임을 천명한 바 있다.


  조건화는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우리 자신이 잘못된 죄인인 것처럼 경험하게 만든다. 이 우주에서 버려진 먼지와 같은 하찮은 존재처럼 스스로를 간주하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불안해진다. 이처럼 조건화로 인해 불안은 생겨난다. 혼나지 않을까 늘 긴장하며 눈치를 봐야 하고, 자신(自身)이 하는 일에 자신(自信)이 없어진다. 매사가 재미없고, 일상에 관심이 없어지며, 살기가 싫어진다.


  우리 자신이 신뢰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이다.


  조건화는 바로 이 인간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비롯하여, 그 불신을 더욱 공고화하는 기제다.


  때문에, 인간을 조건화시키고자 하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에 대해 인본-실존주의 심리학자들이 격렬히 저항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조건화시키고자 하는 NLP, 점성술, 운명론, 영성주의 등의 사이비과학에 대해 회의주의(skeptism)의 세력들이 그 기만성을 파훼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인간이 인간 자신을 억압하는 비극의 역사를 끝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조건화로 인한 고통을 종결짓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정말로 자유롭게 잘 살게 되는 현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더는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이 말은, 몸은 더는 억압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몸은 자유로워야 한다.


  태어난 바 그대로, 몸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너무나도 지독하게 오해되어 왔다. 몸이라는 것이 개별적 육체를 뜻하는 것으로만 여겨졌기에, 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은 그저 개인이 몸을 통해 얻는 자극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해도 된다는 쾌락의 담론으로 굴절되었다. 곧, 개별적 육체의 쾌락주의적 원칙만을 지지하는 소비의 담론으로 환원되었다.


  그렇지 않다. 결코 아니다.


  다시 한 번, 신체현상학자들에게로 돌아가보자.


  그들이 묘사하는 몸이란 무엇인가?


  바로 느끼는 것이다.


  몸은 바로 느낌이다.


  마르셀은, 우리가 느낄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느끼면서 동시에 세계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느낌으로써,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세계를 알게 된다.


  몸을 중심으로 놓는 심리상담의 대가인 젠들린은 느낌을 'felt sense'로 묘사한다. sense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그 핵심은 바로 '앎'이다. 느끼는 것은 곧 아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이처럼 소비의 주체가 아니라 탐구의 주체다.


  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그리고 존재 그 자체를 알아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의 의미와, 이유와, 근거를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더 명확하게, 더욱더 거대하게, 더욱더 의미있게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탐구인 까닭이다.


  소비는 소비하면 할수록 줄어든다. 그러나 탐구는 탐구하면 할수록 커진다. 넓어지며, 깊어진다.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방에 앉아 세상을 바라볼 때는 세상은 작은 것이지만, 우리가 밖으로 나가 직접 우리의 몸으로 여행을 떠나면 세상은 넓은 것으로 체험된다. 그리고 여행하면 할수록, 세상은 더 넓은 것이 된다.


  이 말은, 우리가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 자신과 세계는 더욱더 큰 것으로 개방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조건화의 억압은 역으로 우리 자신과 세계를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작은 것으로 축소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몸의 소비는 실제로는 또 하나의 조건화의 기제가 된다.  그래서 몸에 대한 쾌락주의적 원칙 속에서는 결국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더욱더 크게 우리 자신과 세계를, 곧 몸을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소실된 까닭이다.


  잘 느낄 수 있는 일, 바로 그것이 자유다.


  잘 산다는 것은 잘 몸한다는 것이며, 잘 몸한다는 것은 잘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느낀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곧,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다. '잘'이라고 하는 단어의 모호성은 이 지점에서 '자유'라고 하는 구체성으로 다시 묘사된다.


  그래서 조건화에 의해 몸을 억압할 때, 곧 느낌을 억압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억압하게 된다. 잘 살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몸은 자유의 문제다. 우리가 잘 사는 문제다.


  우리가 잘 사는 일은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최후의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가 잘 사는 일을 향해 전부 다 수렴된다. 이처럼 잘 산다는 것은 우리가 향하는 궁극의 관심사다.


  즉, 우리가 잘 사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거대한, 바로 가장 거대한 것이라는 의미다.


  가장 거대한 것은 결코 조건화될 수 없다. 그것을 조건화할 수 있는, 그것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사는 일은, 우리가 잘 몸하는 일은 결코 조건화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조건화될 수 없다. 주어로서 조건화될 수 없다.


  때문에 우리의 몸은 최후의 술어다.


  몸이 주어가 아닌 술어로서 다시 표현될 때, 우리의 몸은, 느낌은, 자유는, 잘 사는 일은 비로소 회복되며, 드디어 가능해진다.


  '몸은 __________다.'가 더는 아니다.


  '__________은(는) 몸이다.'이다.


  우리가 느끼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라도, "그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잘 살게 되는 것이다.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것을 느끼며, 우리는 그 느낌을 우리의 몸으로 수렴시킨다. 우리의 몸은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완성점이 된다. 느낌이 몸으로 실현된다. 완성된다. 이것이 육화(incarnation)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몸으로 받아들인 세계만큼, 곧 우리가 몸으로 느낀 느낌만큼, 우리는 거대해지며, 더욱 우리 자신의 존재감을 실감하게 된다. 가장 거대한 몸이 되어, 가장 자유로운 몸이 된다. 잘 사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로 사는 삶이다. 잘 사는 삶은 곧 나로 사는 삶이다.


  실존주의는 곧잘, 나로 사는 철학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나로 산다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을 주어로 삼아 만든 몇 가지의 명제에 의해 형성된 정체성으로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로 산다는 것은, 느낌으로 산다는 것이며, 곧 몸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은 몸이 나라고 하는 너무나도 단순한,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지시한다.


  때문에 우리가 생각으로 만들어낸 나라고 하는 정체성을 통해 실제의 느낌을 거부하고, 억압하며, 소외시킬 때, 그것은 나로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집일 뿐이다.


  나로 산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주어의 자리에서 고집부리고 있는 나라고 하는 정체성을 기각하고,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느낌에 대해 "이것 또한 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느낌을 나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느낌을 나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나라고 하는 몸을, 모든 것에 대한 최후의 술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것은 붓다가 말한 무아(無我)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무아는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몸인 내가 주어가 아니라 술어라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나다.'


  이 수상한 말은 이 지점에 이르러, 사실적인 명제로 성립된다.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나다.'


  이 명제는 한결 이해하기 수월해진 형태다.


  '모든 느낌이 나다."


  이것은 더욱 실천적인 품새를 갖추게 된 명제다.


  '이 느낌도 나인가?'


  이것은 가장 정직한 탐구자의 발화다.


  예수가 광야 위에서,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던졌던 그 물음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계 속에서 던지고 있는 그 물음이다.


  세계를 나로 알고 싶어하는 자, 그는 세계를 사랑할 준비가 된 자다.


  탐구자는 언제나 이처럼 사랑꾼이다.


  인간은 최후의 사랑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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