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의미
아워 바디(our body)는 아워 바디(hour body)다.
우리의 몸은 시간의 집이다. 시간이 새겨져 머무는 곳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머물게 된 시간을 우리는 기억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은 세포 하나하나가 바로 이 기억덩어리다. 겪고, 담아내고, 기억하는 일, 그것이 몸의 기초적인 작용이다.
그러나 기억만이 아니다. 기억이 수렴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몸은 동시에 발산한다. 곧, 확장하며 개방해낸다. 그렇게 우리의 몸은 '뒤'를 끌어안고 '앞'을 향한다.
몸의 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러한 몸의 작용이 결국 미래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희망을 향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의 제자이자, 의미의 해석학자인 폴 리쾨르는 우리가 기억으로서의 현재, 지금으로서의 현재, 희망으로서의 현재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시간이 언제나 현재에서 작동하는 존재론적 시간임을 묘사한다.
분명하게, 우리의 몸은 현재에만 있다. 때문에 존재론적 시간은 바로 우리의 몸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에서 전개되는 존재론적 시간의 활동, 이것을 우리는 몸짓이라고 부를 수 있다.
몸은 언제나 짓을 한다. 지금은 없는 과거의 기억을 현재적으로 끌어안고, 지금은 없는 미래의 희망을 현재적으로 끌어오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몸은 언제나 간절한 짓이다. 파닥파닥 쉬지 않고 활어처럼 약동하는 절규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절규하는가?
바로 의미를 찾고 싶어서다.
자기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어서다.
의미, 그것이 곧 희망이다.
이 영화는 자기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 곧 희망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하나의 간절한 몸짓을 묘사하고 있는 영화다.
그리고 그것은 말 그대로 발버둥이다. 쉬지 않고 발을 움직이는 일이다. 그렇게 가열한 호흡으로 달리는 일이다.
자기의 삶에서 더는 어떠한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게 된 한 인간이 있다. 그녀에게 과거는 낭비된 무게의 짐덩어리일 뿐이며,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는 암흑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현재의 자신(自身)을 수치스러워한다. 자기 몸을 수치스러워한다. 그녀가 체험하는 모든 현재에는 수치심만이 유일하다.
처음에는 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달리기 시작한다.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는 생각을 없애고 단지 몸짓만 남기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녀가 달리기를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또 다른 그녀에게, 자기와는 다르게 아름다운 몸을 가진 그 달리기의 선배에게 다가가기 위해 또한 그녀는 몸짓을 이루어간다.
그 몸짓이 점점 무르익어 그녀가 또 다른 그녀와 이제 친구가 되고, 그녀 자신 역시도 스스로의 몸을 조금은 더 유연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갑작스레 하나의 죽음이 찾아온다.
이제야 겨우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의 문을 발견했다고 그녀가 느낀 그 순간, 문은 그렇게 그녀 앞에서 세차게 닫히게 된다.
그리고 닫힌 문 앞에서 그녀가 멈출 수밖에 없게 된 그 순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찾은 의미마저 사라졌다고 느끼게 된 그 순간, 더는 그녀 자신이 살아갈 의미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그 순간, 그녀는 불현듯 눈치채게 된다.
그녀의 친구의 죽음처럼, 그녀 자신도 바로 이렇게 이미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그 죽음에 담긴 의미에, 즉 그 삶에 담긴 의미에 관심을 갖지 않으며, 이 모든 삶은 단지 망각 속으로만 소외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소외되어 있었기에 그것이 수치스럽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달리기를 시작한다. 아니 이제야 정말로 달리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발버둥은 더는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소외된 채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 자신의 지난 시간을, 그리고 친구의 지난 시간을, 그녀의 온몸으로 끌어안고 이를 다시 이해하기 위한 간곡한 몸짓이다.
그렇게 그녀는 그녀의 뒤편으로 사라져간 것들을 다시금 현재로 살아낸다.
그녀의 몸은 담고 기억한다.
담는 것은 닮는 것이다.
그녀는 몸으로 그녀의 친구를 담아, 그녀의 친구를 닮아, 지금은 없는 그 삶을 지금의 이 삶으로 드러낸다. 다시는 없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그 몸에 새긴다. 이로 인해, 그녀의 친구는 그녀 자신이 되고, 그녀의 친구가 살아간 의미에 대한 이해는 그녀 자신이 살아온 의미에 대한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 이해를 통해 그녀의 몸은 점점 더 개방된다. 확장된다. 그 몸을 통해 살고 있는 것이 더는 그녀만이 아닌 까닭이다. 그녀의 친구의 삶이 그녀의 몸을 통해 더불어 살아지고 있는 까닭이다. 바로 이 더불어의 존재감이 확장되는 만큼 그녀는 또한 자신을 더욱 자유롭게 느끼게 되고, 스스로를 더욱 사랑스럽게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몸으로 말미암아, 사라진 것이 살아지고, 살아진 것이 살가워진다.
분명하게, 모든 몸짓은 슬피 잃어버린 것을 깊이 새기기 위함이다.
새기는 것은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곧, 모든 몸짓은 영원을 향한 몸짓이다.
그리고 마르셀은 말한다. 우리가 잃어버리게 될 그것이 영원하기를 희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이 사랑은 반드시 우리의 몸을 통해 실현된다.
사라진 그것이 의미있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증명해주는 행위는, 바로 그것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터로 하여, 사라진 그것이 다시 또 살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살가운 행위가 바로 사랑이다. 이처럼 의미는 사랑을 통해 확언된다. 그래서 사랑 속에서만 희망은 존재한다.
우리의 몸은 시간을 담아내, 그 시간을 의미있는 것으로, 곧 살가운 것으로 실현해낸다. 몸은 그 자체로 사랑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말 그대로의, 육화(incarnation)의 함의다. 몸을 벗어난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몸이 있기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아니 우리가 몸이기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몸의 의미다.
우리는 몸을 통해, 사라진 하나의 삶을 기억하고 그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발견하며, 그 삶을 우리의 몸으로 실현되게 함으로써 그것이 정말로 의미있었음을 스스로 증거한다. 이러한 몸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삶이 비록 물리적인 시공간 속에서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어가고 영원한 것으로 새겨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작용을 우리는 바로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몸의 의미는 곧 마음이다.
삶을 잇는다는 것은 마음을 잇는다는 것이다.
마음을 소중하게 잇는 일, 이것을 또한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언제나 재귀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랑하는 우리 자신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든다. 하나의 삶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 자신을 더욱 귀해지게 만든다.
보라, 나의 몸은 왜 소중한가?
바로 당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이 몸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몸을 통해, 사랑하는 당신을 또 만나게 된다. 영원히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몸은 언제나 당신과 만날 수 있는 현재의 시간이다. 그 소중한 시간의 집이다. 아워 바디(hour body)다.
스웨터 - 타임 포스트는 잊지 말아요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봤어
시간의 너울 넘어 돌아온다던 길을
알면서 또 다시 멈추는 발끝
그 언젠가 느꼈던 익숙한 그 몸을 마주하면
아 나를 볼 순 없어도 그곳만은 기억해줘
숱한 날들이 쌓여도
나 없는 날들이 할퀴어도 이것만은 간직해줘
눈부신 그 날의 웃음을
한동안 힘들게 외면해왔어
계절의 파랑 넘어 불어올 그 순간을
바람 속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네가 나를 부르면 늘 그렇듯이 난 대답할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곳만은 기억해줘
숱한 날들이 쌓여도
나 없는 날들이 할퀴어도 이것만은 간직해줘
아득한 그 날의 편지를
한 번의 봄이 지나 꽃잎처럼 흩어져도
다시 올 장마의 그 비로 돌아와
숱한 날들이 쌓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