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노는 메기가 멀리 본다
메기는 흙의 정령으로 묘사된다. 특히 일본신화에서 메기는 지진을 관장하는 신수(神獸)다.
지진은 명백하게 불안의 사건이다. 우리가 발을 붙이고 서있는 근간이 흔들린다는 것은, 더는 확고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없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가장 강력한 불안의 상황이다.
불안은 의심을 낳는다. 의심이 강해지면 불신이 된다. 불신의 대상은 곧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에 화를 냄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실존적 신학자인 틸리히가 말하는 것처럼, 불안에서 두려움으로의 이 전환은, 다루기 막연한 불안을 좀 더 다룰 수 있을 만한 소재로 형상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언어적 전환일 뿐이다. 우리가 불신하는, 곧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아무리 정의로운 공분을 통해 규탄하고, 심판하며, 정죄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곧, 불안은 혐오와 증오의 활동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의의 적을 규정해놓고, 그 적으로 인해 위협이 생겨나는 것처럼 두려움의 구조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 두려움의 원형인 불안의 실제는 그러한 구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명확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우리도, 우리의 적도, 똑같은 불안의 대지 위에 놓여 있다는 것.
남자도 여자도, 의심하는 자도 의심받는 자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똑같이 불안하다는 것.
그리고 문제는 오직 이것뿐이다.
자신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소외할 때, 우리는 그 불안의 이유를 타인에게 떠넘기기 위해, 혐오와 의심과 가해를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 속의 그 누구도, 자신들의 근간을 위협하며 무수하게 생겨나는 싱크홀의 현상 앞에 불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깊다. 그들은 오직 두려워하며, 서로를 의심하고 화만 낼 뿐이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마치 상대로 인해 자신의 삶이 망쳐지는 것처럼 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메기로 돌아와보자.
메기는 자연물이며, 메기가 일으키는 지진은 자연현상이다.
자연현상이 곧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우리가 불안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 불안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애초 생겨먹은 꼴이 불안한 것이다. 이 지구별의 생태가 원래 불안한 것이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가 본래 불안한 것이다.
메기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지진의 이유가 되는 메기의 활동은 바로 몸부림이다.
그렇다면 메기는 왜 몸부림을 치는가?
자유롭고 싶어서다.
자신을 위에서 누르고 있는 대지가 너무나 갑갑한 까닭이다. 영화 속의 묘사로 말하자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유리수조가 너무나 갑갑하고, 유리천장이 너무나 갑갑한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불안의 표현인 것이, 메기의 입장에서는 자유의 표현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메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음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실존철학의 입장에서, 불안은 그 자체가 곧 자유다. 불안과 함께 사는 이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메기의 생태 그 자체다. 불안을 자신의 것으로 승인함으로써 메기의 몸부림은 자유를 향한 것으로 다시 발견된다.
불안을 은폐하는 사회는, 곧 불안을 두려움의 논리로 뒤바꾼 사회는 언제나 평면적이다. 깊이가 없다. 수평적인 차원에서 우리편과 상대편의 구분을 만들어,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성전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리차드 바크의 걸작인 『갈매기 조나단』에서 나오는 잘 알려진 격언이 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그리고 우리는 이 격언을 이 영화에 맞춰 다음과 같이 각색할 수 있다.
"깊이 노는 메기가 멀리 본다."
이것은 수직적 지평에 대한 은유다. '높이'와 '깊이'는 같은 것이다.
불안은 인간에게 이 수직적 지평을 개방한다. 그리고 그 개방의 결과는 '멀리 보는 현실'이다. 이를 다시 풀어서 말하면, 바로 '자유로운 현실'이다. 멀리 본다는 것은 자유의 은유다. 이 자유는 『갈매기 조나단』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싱크홀의 현상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사실은, 사람들이 모두 평면으로만, 즉 수평적 논리로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수직적 지평은 사람들에게 위협인 것처럼만 경험된다. 엄연한 수직의 현실을 드러내는 싱크홀의 구덩이는, 서둘러 메워져야 하거나, 그 구덩이로부터 조속히 빠져나와야 하는 것으로만 묘사된다. 즉, 수직에 대한 인식은 최대한 빠르게 은폐되어야 한다.
이것은 텅 빈 구덩이라고 하는 소재가 암시하는 것처럼, 수직에는 반드시 '없음'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 세련된 표현으로는 '비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주 단순하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수직적 지평을 개방하는 데는 반드시 이 비존재의 가능성이 동반된다. 프시케와 에로스의 신화에서 묘사되는 것과도 같다. 사랑을 얻기 위해 프시케는 절벽에 몸을 던진다. 그렇게 비존재의 가능성을 받아들인 뒤에야, 서풍의 도움으로 프시케는 에로스에 닿게 된다. 절망으로 추락하는 인간이 그 절망을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상승하게 된다는 키르케고르의 묘사와도 같다.
다시 한 번, 불안은 우리가 비존재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곧, 우리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기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불안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안은 우리의 삶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어한다는 자기주장이라는 것이다.
불안이 은폐되면 결국엔 우울이 된다. 우울은 삶의 활력이 소실된 상태다. 불안을 억지로 누르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무수한 두려움들에 치이며, 그 두려움들을 어떻게든 또 해결해내기 위해 온갖 힘을 동원할 때, 그 결과 우리는 우울해진다. 안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우울을 만드는 셈이다. 곧, 안정에 대한 과잉된 의지가 삶을 오히려 화석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의 화신인 메기는 너무나도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몸부림친다. 자신이 엄연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그리고 자신이 분명하게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크게 용트림한다.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 그것이 바로 깊이다.
역설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죽더라도 살고 싶어할 때, 우리는 수직적 지평을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끝없는 깊이를 우리는 심연(abyss)이라고 부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싱크홀이다.
이 심연은 바닥이 없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준다. 그래서 심연은 사랑의 속성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깊이의 차원에서 바닥이 없다는 것은, 높이의 차원에서 천장이 없다는 의미와도 같다. 즉, 심연이 있을 때 우리는 제약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 끝없는 깊이가 우리의 자유를 가장 크게 지지해준다.
이처럼 깊이는 무조건 좋은 것이다.
깊이는 결코 우리의 위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심연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자신의 심연이 있다.
그리고 그 심연의 구덩이는 메워져야 하거나, 빠져나와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실존철학자인 마르셀의 표현처럼, 오히려 그것은 신비다. 바라봐야 할 신비다.
자신의 심연을 신비롭게 들여다보는 이는 결국 목격하게 된다.
그 가장 깊은 자신의 심연에서 노닐고 있는 한 마리의 메기를.
그것은 가장 몸부림치는 불안이기에, 가장 깊은 사랑이며, 가장 강렬한 삶에의 소망이고, 가장 거대한 자유다.
꿈틀거리는 삶 그 자체다.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불안이 자유를 개방하듯, 믿음은 의심으로만 개방된다.
이 이야기를 불확실한 것으로서 의심할 때, 그래서 직접 그 심연을 확인하고자 자신의 시선을 심연으로 향할 때, 그것을 틸리히는 용기라고 말한다.
믿음은 언제나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삶을 신뢰하며 살아보고자 하는 그 용기다. 메기의 용기다.
조동익 - 물고기들의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