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깨닫는마음씨 Sep 29. 2019

책임감이 강한 그대에게

"애증의 변증법"



  그대여,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고 책임감을 다하는 자기의 모습을 한편에서는 뿌듯하게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여, 책임감이라는 표현을 질식감이라고 바꾸어보면 어떤가?


  그대는 단지 숨이 막히고 있는 것이다. 압력이 가해져 그대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압력은 누가 가하고 있는가?


  바로 그대 자신이다.


  압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출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압력의 세기는 분출되는 것의 세기와 정확하게 비례한다.


  그대가 강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대에게서 강하게 분출되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다. 그것을 누르기 위해 그대는 스스로에게 질식할 정도의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그것이 분출되는 것을 가장 막기 어려운 것은 바로 말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우화와도 같다. 말이 그토록 막기 어려운 이유는, 말은 마음의 의도를 담은 호흡작용인 까닭이다. 산소로 호흡하는 생명체가 숨을 참는 일이 불가능하듯이, 마음의 의도로 사는 인간이 말을 막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대는 대체 무슨 말을 그토록 강력하게 봉쇄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일까? 애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처럼 왜 그토록 무리하게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그대여, 책임감은 언제나 인격적 상대에 대해서만 걸리게 된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에 대한, 또는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책임감도 잘 살펴보면 반드시 어떠한 구체적 상대에 대한 책임감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처럼 그대가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상대를 증오한다. 그대가 느끼는 책임감의 강도와 증오의 강도 또한 정확하게 비례한다.


  때문에 그대의 책임감만큼이나 그대 안을 격하게 채우고 있는 "너를 증오해."라는 말이 터져나오지 않도록, 그대는 스스로의 목을 조르며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책임감을 느끼는 그 상대도 아니며,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니다. 오직 그대가 그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을 뿐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때, 그대는 책임감을 느끼는 상대가 오히려 그대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더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대의 증오를 세간에서 무책임하다고 말해지는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돌린다.


  그렇게 그대는 그대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또는 증오하면 안된다고 억압함으로써, 이 질식의 구조를 온건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와의 애증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애착관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집착(attachment)의 의도가 지배적인 양상을 띠는 관계를 일컫는 표현들이다.


  그대가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상대는 전부 다 이 애증의 대상이다. 그대의 책임감은 애증관계 속에서 유발되는 것이다.


  그대의 책임감이 애증이라는 이 사실을 정직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대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애증관계에 놓여 질식감으로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만 같은 그대여, 혹여는 목이 졸리는 질식감을 만족스러운 쾌락으로 경험하기까지 하는 그대여, 그대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이것뿐이다.


  있는 것을 있게 하는 일, 그것이 그대가 해야 하는 전부다.


  애(愛)의 감정만큼 증(憎)의 감정도 있게 해야 한다. 애의 고백만큼 증의 고백도 있게 해야 한다. 마음이 말이 되게 해야 한다.


  모든 고통은 마음이 말로 나가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히기 때문에 생겨난다.


  마음이 말이 되어야 한다. 말이 되는 현실이 생겨나야 한다. 아무리 그대가 애정으로 책임감을 느끼는 상대라도, 그 상대를 증오할 수 있는 현실이 충분히 말이 되어야 한다. 가능해야 한다.


  그대가 증오하는 일은 말도 안되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충분히 말이 되는 온전한 일이다. 그대는 온전하다.


  모순처럼 느껴지는 애증관계 속에서 그대가 스스로를 온전하게 할 수 있는 일, 그것이 바로 그대가 해야 할 모든 일이다. 이것이 바로 애증의 변증법이다.


  반대되어 있는 것을 동등하게 있게 하는 이 변증법의 작업은 또한, 그대가 전체를 볼 수 있도록 환기시켜줌으로써 그대에게 새로운 지평을 개방해준다.


  그대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애증관계라는 사실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아니, 관계 자체가 곧 애증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사르트르는 "타인이 곧 지옥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대가 관계 속에서 느끼던 책임감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관계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더 명확해질 수 있다.


  그대여, 책임감은 특정한 역할을 잘 수행해야만 한다고 하는 압박이다. 곧, 책임감은 역할에 대한 것이다.


  관계란 바로 이 역할끼리의 작용이다. 이른바, 관계는 역할극이다.


  역할은 인간이 사회적인 공동생활을 하면서 생존의 필요에 따라 구성된 것이다.


  여기에서 구성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구성은 만들어진 것이지, 그것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자식, 형제 등의 모든 역할은 생존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며, 임의적인 것이다.


  필요가 역할을 결정한다.


  이 말은 필요에 봉사하는 것이 역할이지, 역할에 봉사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필요가 채워지면 역할은 종료된다. 콜라를 마시고 나면, 콜라캔의 역할은 끝이 난다. 이와 같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필요가 채워지면 그 역할은 종료된다. 관계는 해체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움 속에서 남겨지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래적인 의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역할 속으로 들어가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었던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역할이 종료된 후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열연을 마친 배우가 박수 속에서 드러나는 것과도 같다.


  성실한 의무를 다하는 역할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역할 밖에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역할도 아닌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든 역할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그 누구도 아닌, 그 어떤 관계 속의 역할도 아닌, 다만 그 자신인 이 인간을 눈치채는 일을 소위 깨달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역할을 깨고 인간에게 닿는 것이다.


  그대여, 그래서 어디에나 깨달음이 있다. 어디에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역할이 있기에, 역할 밖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질식할 것 같이 느끼는 그 책임감 속에도, 바로 이 인간을 깨닫고자 하는 몸짓이 이미 담겨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관계 속 역할로서의 책임감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상대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이미 그 책임감이 다루는 영역이 더는 필요의 영역이 아니라 욕망의 영역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곧, 상대의 욕망을 채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이미 그것은 필요에 봉사하는 역할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누구의 욕망도 채워줄 수 없다. 동시에 그 누구도 그대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


  그대의 욕망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단 하나의 궁극적인 욕망, 바로 자유롭고 싶은 욕망인 까닭이다.


  그대여, 한번 떠올려보라.


  그대가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욕망은, 돈이 많음으로써 돈 걱정을 안하고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다. 아름답고 싶은 욕망 또한,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짐으로써 더는 아름다움의 경쟁에 시달리지 않고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다. 모든 욕망이 이와 같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롭고 싶은 욕망인 까닭에, 결코 타인은 줄 수 없는 것이다. 타인에게 의존하여 얻게 되면 이미 자유가 아닌 까닭이다.


  때문에 그대가 상대의 욕망을 채워주려는 근면한 태도를 책임감이라고 말할 때, 이는  타인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주려고 하는 애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고집부리고 있는 것과 같은 현실이 된다. 그 결과, 그대도 고통스럽게 되고, 상대도 고통스럽게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대가 상대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의 욕망을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그대이기에, 그대는 상대 앞에서 반드시 무능력함을 실감하게 된다. 따라서 그대는 그 상대가 너무나 미워진다. 상대가 그대를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기 역할도 제대로 못해내는 부족한 존재로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대는 상대가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상대로부터 떠나고 싶어진다. 즉, 상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대여, 바로 이것이다.


  그대가 관계 속 상대에게 증(憎)의 감정을 경험하고 있을 때, 그대는 그대의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증의 크기만큼, 그대는 자유롭고 싶어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대가 관계 속 상대에게 다 주고자 하는, 곧 상대의 욕망을 채워주고자 하는 애(愛)의 감정을 경험하고 있을 때, 그대는 결국 그 상대가 궁극적인 욕망인 자유를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대는 상대의 자유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애증관계가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성은, 그대도 자유롭고, 상대도 자유로운, 상호적 자유의 현실을 향한다. 그래서 붓다는 집착에서 자유로워진다는 표현을 썼다. 집착으로 말미암아 곧 자유라는 정확한 방향성이 알려진다는 말이다.


  그대도 자유롭고, 상대도 자유롭기를 바라는 이 소망이 정확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때문에 그대가 정직해야 한다. 그대가 잘 역할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관계가 바로 애증관계라는 사실을 이해하며, 그 애증관계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정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애의 감정에 정직한 만큼 상대의 자유가, 증의 감정에 정직한 만큼 그대의 자유가 개방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결국 애도 아니고, 증도 아니다.


  다만 자유일 뿐이다.


  그대여,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선도 악도 아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애도 증도 아닌, 그저 인간이다.


  그 모든 것이 다 아니라서, 그 모든 것을 책임지는 대신에 깊게 음미할 수 있는,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다 온전하게 가능할 수 있는 자유의 존재다.


  그대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말도 안되게 가장 말이 되는 그대의 이름이다.






Alice in Chains - Love, Hate, Love
Lost inside my sick head
머리만 아프고 더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I live for you but I'm not alive
난 너를 위해 살지만,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아
Take my hand before I kill
내가 널 죽여버리기 전에 제발 내 손을 잡아줘
I still love you, but, I still burn
난 여전히 너를 사랑하지만, 여전히 불타고 있어
Yeah, love, hate, love
사랑해, 미워해, 사랑해
Yeah, love, hate, love
사랑해, 아니 미워해, 아니 사랑해


작가의 이전글 메기(Maggie, 20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