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41

"마음을 곱게 쓴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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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이해는 마음을 잘 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마음을 잘 배우는 것도 아니다.


핵심 중의 핵심은 오직 마.음.을. 잘. 쓰.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점점 잘 쓰게 되어서, 스스로 두 다리로 걷고, 스스로 두 발로 자전거를 타며, 스스로 두 팔로 사랑하는 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삶의 즐거움은 엄청나게 증대되어 간다. 삶이라는 것이 정말로 하루하루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재가 되며, 거의 매순간이 행복하고, 진심으로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마음도 똑같다.


마.음.을. 점.점. 잘. 쓰.게. 됨.으.로.써. 우.리.의. 행.복.은. 더.욱.더. 커.져.간.다.


불안, 두려움, 공허감, 외로움, 지루함, 짜증, 불만족, 초조함, 시기, 질투, 열등감, 분노, 소진, 무기력, 우울 등의 거의 모든 심리적 갈등의 증세들은 우리가 마음을 잘 쓰지 못할 때 경험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마음을 잘 쓰지 못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평생을 유아용 보행기에 탄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자신의 몸을 잘 쓸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


우리는 정신적 보행기와 같은 것에 아주 긴 시간 동안 탑승하고 있었다.


그 유모차의 이름이 바로 '이야기'다.


이념, 이상, 서사, 스토리, 내러티브, 본질, 윤리, 신화, 교훈, 가치관 등이 다 이야기의 여러 이름들이다.


이야기는 개인의 마음을 대신해서 소비하도록 개인에게 권장되어 온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소비하면 좋은 마음이 생긴다는 가정하에, 이야기는 개인의 '실제적인 마음'보다 앞서 개인의 '가상적인 마음'을 구성하는 소재가 되어 왔다. 이야기에 의해 형성된 그 가상의 마음을 개인들은 자기 마음인 줄 알고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이처럼 우리는 이야기라는 유모차에 실린 채 자신의 마음을 써볼 기회를 좀처럼 가질 수 없었기에, 우리가 마음을 잘 쓰지 못하게 되어 잦은 심리적 갈등을 경험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실이다.


정말 진심을 다해 전하건대, 이야기만을 계속 소비하고 있으면 우리가 마음을 잘 쓸 수 있게 되는 현실은 요원해진다. 이야기를 적절히 잘 쓰면 마음도 잘 쓰게 되는 것이 아니다. 유모차를 적절히 잘 쓴다고 아이가 보조바퀴를 뗀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열심히 몸을 쓰고 즐겁게 논 뒤에 좀 쉬고 싶을 때는 유모차에 누워 몸을 맡기는 일은 물론 유익하다. 이 경계는 분명하다. 유모차는 현재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스스로의 몸을 즐기며 삶을 증진시키고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마음을 잘 쓰고 있는 이들은 이야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이야기에 의존함으로써 마음을 잘 쓰는 역량이 발달하는 것 또한 아니다.


더 오래 유모차를 타고 있다고 메시가 되지 않듯이, 더 많은 이야기를 소비해서 마음의 현자 같은 것이 된다는 발상은 판타지 중의 판타지다.


마음을 잘 쓰는 역량은 오직 스스로 마음을 씀으로써만 발달한다.


마음을 쓰는 일 중에 가장 잘 쓰는 일은 바로 마음을 곱게 쓰는 일이다.


깨.달.음.은. 곧. 마.음.을. 곱.게. 쓰.는. 삶.이.다.


곱다는 것은 부드럽고, 섬세하고, 유연한 특성을 뜻한다. 작은 것도 잘 놓치지 않으며, 현재 펼쳐지는 것들에 깊이 관심을 두고 자신을 내맡기며, 그렇게 드러나는 삶에 응답함으로써 그 삶을 음미할 줄 아는 사려깊은 감수성이다.


그래서 곱다는 것은, 유순하게 인사 잘 하는 예의바름이라든가, 초등학교 반장 같은 착한 아이의 모습이라든가, 유약해서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언행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순응하는 아이'의 모습은 사실 '고움' 대신 소비되게끔 이야기가 만들어낸 가상의 소재다.


곱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이해하려면 몸과 연결지으면 된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유연한 특성은 곧 우리 몸의 특성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곱게 쓰는 일 또한 분명하다.


마음을 몸처럼 쓰는 것이다.


우리가 유모차에서 내려 우리의 몸을 처음 쓰게 되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좋다. 우리는 외부의 세계를 향해 조심조심 다가가 마찬가지의 조심스러움으로 손을 뻗는다. 사려깊게 우리는 접촉하며, 이제 세계와 만나 즐거워한다. 여기에는 지금 두 개가 동시에 귀하게 대해졌다. '자신'과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몸.을. 곱.게. 쓰.는. 일.은. 언.제.나.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귀.하.게. 대.하.는. 일.이.다.


이를 더 쉽게 말하면 이러하다.


"세계를 귀한 내 몸처럼 대한다."


마음도 똑같다.


우리가 마음을 곱게 쓸 때, 우리는 조심스럽게 우리의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곤 한다. 그 섬세함이 이미 상대의 마음을 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그 깊은 뜻이다.


마.음.을. 곱.게. 쓰.는. 일.은. 언.제.나. 자.신.과. 상.대.를. 동.시.에. 귀.하.게. 대.하.는. 일.이.다.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다.


"상대를 귀한 내 마음처럼 대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귀하게 대한다는 의미는 이야기들에 의해 오해되어온 바가 큰다.


이것은 좋은 이야기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상하게 허용하는 부모가 되어, 상대를 최고로 만족한 왕의 옥좌에 앉은 아이가 되게끔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귀한 것은 대하기 어려운 것이고, 심지어는 두려운 것일 때도 있다. 아이처럼 우쭈쭈 알아봐주며 만만하게 하대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귀.하.게. 대.한.다.는. 것.은. 경.외.심.에. 입.각.한. 존.중.의. 의.미.다.


전하기 어렵고 떨리지만 용기를 내어 한번 전해보려 하는 것이 이러한 존중의 태도다. 나아가서는 상대가 현재 전해받을 수 없는 상태라면 전하지 않고 다만 떨려보는 것이 또한 상대를 귀하게 대하는 존중의 태도다.


고.운. 것.은. 원.래. 조.금. 떨.린.다.


늘 마음을 써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생한 호흡을 이루며 진.짜.로. 살.아.가.기.에. 늘 곱다.


삶이 원래 곱다. 진짜로 살아가는 삶이 가장 곱다.


이처럼 마음을 곱게 쓴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산다는 것이다. 참된 삶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실존'이라는 개념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우리가 '곱다'라는 어감에서 깃털의 부드러운 풍모를 연상할 수 있으면, 참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더 우리에게 와닿게 된다.


참된 삶은 우리가 날개를 갖게 된 삶이다.


마.음.은. 인.간.에.게. 허.락.된. 고.유.한. 날.개.다.


몸이라는 표현은 조금 더 땅과 연결된 감각을 담지하고, 마음이라는 표현은 조금 더 하늘과 연결된 감각을 담지한다는 사실을 이해해보자.


우리는 몸을 통해 땅의 것들과 접촉해가며 삶을 증진하지만, 몸으로 닿지 못하는 것에도 우리는 접촉할 수 있다. 먼 다른 땅에 있거나, 지금은 이 땅에 없는 것에도 우리는 분명 마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초월성이라고 부른다. 하늘은 언제나 초월성의 상징이다.


인간은 마.음.이.라.는. 날.개.를. 씀.으.로.써. 유한성 너머로도 삶을 증진해나갈 초월성의 신비를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음은 이처럼 인간에게 하늘의 '높이'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또한 하늘빛의 '깊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은 '높은 깊이(high depth)'이며, 동시에 '깊은 높이(deep height)'이다. 이 둘은 초월성에 대한 고전적 은유어들이다.


그런데 이 초월성은 인간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원래 인간의 것이었다. 떠올려보자.


고운 것은 날개다. 날개는 높이의 소재이며, 또한 깊이의 소재이다.


곧, 날개는 3차원의 것이다.


고.운. 것.은. 3.차.원.이.라.서. 곱.다.


애초 3차원에 태어난 인간이 마음이라는 고운 것을 곱게 씀으로써 비로소 제 면목인 3차원을 다시 찾아 살게 된 것이다. 고운 것을 곱게 씀으로써, 인간이 스스로의 고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마음을 곱게 쓰는 일은 이와 같다.


이것은 언제나 마음을 쓰는 인간 자신이 더욱더 곱게 드러나는 일이다.


참된 삶, 인간이 3차원의 참(reality)이 되는 삶의 일이다.


이야기는 지금 이 글과도 같이 2차원에 쓰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애초 3차원의 것이다. 2차원의 것은 3차원의 것에 간섭하고 개입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텍스트의 평면 위를 유모차로 밀고 다니는 일을 지속할수록 우리는 3차원의 존재를 2차원의 것으로 억지로 퇴락시키게 된다.


불안, 두려움, 공허감, 외로움, 지루함, 짜증, 불만족, 초조함, 시기, 질투, 열등감, 분노, 소진, 무기력, 우울 등의 거의 모든 심리적 갈등의 증세들이 생겨날 것이다.


3차원의 입체적인 것이, 심지어 하늘을 날아야 할 것이, 보행기의 바퀴에 깔려 평면으로 억눌린 채 고통받게 된 그 신음소리다.


살펴본 바와 같이, 마음을 곱게 쓴다는 것은 뻔한 도덕적 얘기가 아니라, 실은 엄청난 존재론적 얘기다.


우리의 신음소리도 그렇게 들을 필요가 있다.


엄청난 것이 지금 자신의 고운 참모습을 다시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닫.고. 싶.은. 것.이.다.


깨닫고 싶어서, 고운 것은 원래 조금 떨린다.


마음을 잘 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며, 지금이 바로 잃어버린 날개를 되찾을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버리고, 이제 당신이 곱게 날아오를 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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