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NMS #1

"나는 거기에 없었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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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스토리텔링을 시작해보자.


나는 아마도 문학소년이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했고, 이야기에 푹 빠져 살았다.


엄마의 품 대신에, 나는 이야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엄마는 파주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한 술집의 접대부였다고 들었다. 영어를 잘했던 아빠는 부근의 한국군 부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외박을 나올 때마다 해당의 술집에서 미군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도 들었다.


가엾은데 섹시하다, 그런 인상이었을 것이고, 그런 독이었다.


아빠를 만날 때면 엄마는 괜히 수줍었던지 당시 언니동생하며 친했던 인순이 님을 대동했다고 한다. 아빠도 굳이 쑥스러웠는지 작은 고모는 바쁘게도 호출되곤 했다.


그렇게 각자가 급조해서 달고 나온 브레이크가 큰 효과가 없었음은 나의 출생이 증명할 것이다.


뜨거울 때 분명 꽃이 핀다. 아빠는 집에서 대학등록금으로 받은 돈으로 월세집을 꾸렸고, 엄마는 일을 정리한 뒤 나를 낳았다.


꽃이 꽃을 낳았지만, 그것이 늘 경사만은 아니었다.


3대째 목사집안인 가정에서 '술집여자'에 대한, 또 적격한 절차를 밟지 않은 문란에 대한 분노는 쉬이 잠재울 길이 없었다.


목사는 몽둥이를 들었고, 목사사모는 비수를 내뱉으며, 그들의 아들은 체념한 것처럼 말이 없었다.


쫓겨가는 이에게도 말이 없었다. 지금도 그 말을 알지 못한다.


만약에 그 아들도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사고로 이 삶을 급히 정리하게 되리란 것을 모두가 알았더라면, 목사의 손주는 엄마를 그 곁에 얻을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러나 다른 생각을 했다.


국민학교에서 국민의 의무를 담아 어버이날에 부모님에게 편지쓰기를 할 때, 나는 도무지 있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을지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 있다는 게 좀 잘못된 일이란 걸 나는 분명히 알았고, 나는 분명히 조숙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어렵사리 친해진 2명에게 문득 "나는 너희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는 소리를 나는 들었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조숙했지만, 그 조숙함을 다룰 수 있는 섬세함이 없어 거칠고 촌스럽기만 했다.


사람이 너무 어려웠다.


책으로 도망갔다.


이야기로 체온을 대체했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으로 남겨진 서재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빼어들고 그냥 읽었다. 가리지 않았다. 한국 근현대 소설, 세계문학고전, 동서양의 철학서, 백과사전, 포르노잡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더 조숙해졌고, 촌스럽게 머리만 커졌으며, 사람은 더욱 무서워져만 갔다.


사람이 무서우니 현실이 무서웠다.


서가에 꽂혀 있던 정신문화사의 책들이 내 손에 잡힌 것은 사춘기가 찾아온 그 즈음이다.


장자도, 오쇼도, 크리슈나무르티도, 현실이 무서운 소년에게는 이세계로의 문과도 같았다. 트럭에 치이지 않고도 나는 이세계의 문을 열었으며,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만큼 현실은 더욱 매서운 칼춤으로 내 가슴에 쏟아져 내렸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당대의 목사인 큰아버지는 고아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타락한 그의 동생과 달리 그 조카를 올바르게 키워야 할 신성한 책무가 그에게는 있었다.


자위를 한 휴지를 들추어내고, 꼭꼭 숨겨놓은 야동비디오를 찾아내어 책상 위에 선물꾸러미처럼 쌓아놓고는, 새벽에 불꺼진 거실로 불러내던 그 음성 앞에서 나는 아담처럼 떨었다.


내적으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던 그 도취는 냉혹하게 습격해오는 현실 앞에서 늘 무력하게 허물어지기만 했다.


환상으로 도피할 수도 없고, 현실에 적응할 수도 없던 나에게 최선은 자신을 마비시키는 일뿐이었다.


얼굴은 틱처럼 늘 경련하며 경직되었고, 로봇 같다는 말은 나에게 따라붙던 단골의 수식어였다. 모든 것이 다 무의미했고, 근본적으로 공허하기만 했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와 SNK의 대전게임만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기에는 조금 많이 아팠다.


오락실에서 얻어 맞던 경험들 속에 기억나는 대사들은 이와 같았다.


"잘하면 잘하는 거지, 씨발새끼가 왜 사람을 놀리듯이 게임을 하냐?"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갔고 억울했다. 자기들이 게임을 못해서 생긴 열등감을 나에게 화로 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가 나있던 것은 나였다.


화가 나서 모든 것을 나보다 못한 존재처럼 놀리고 싶었던 것은 분명 나였다.


카프카는 나에게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게 된 그 날 나는 잠들 수 없었다. 큰아버지 앞에 매번 호출되어 온몸이 떨리던 그 감정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 까닭이다.


나는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화였다.


화 그 자체였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하나의 다이너마이트다."


니체가 말한 그게 바로 나였다.


이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다. 온 세상에 불을 질러버리고 싶었다. 나는 소리없이 절규했다.


그리고는 책상에서 커터칼을 꺼내 온 몸을 그었다.


이제 마릴린 맨슨은 내 친구였다. 앨리스 인 체인스의 넛쉘은 내 주제가였다.


그리고 니체는 내 경전이었다.


큰아버지는 헤겔과 독일 낭만주의 철학, 그리고 신영복을 존경했다.


내가 니체로 무장하게 된 것은 운명적 필연이었다.


실존주의는 나에게 단지 관념적인 철학적 사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재였다. 실존은 정말로 나에게는 생존의 간절함이었던 것이다.


"더는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마."


나는 더욱 예민했고, 내 권리를 사수하는 일에 민감했으며,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언행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표현 그대로 나는 벼랑 끝에서 절박했던 것이며, 절박할 때면 늘 몸을 난도질했던 20대였다.


울지 못해서 대신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다.


20대 초반에는 원하지도 않는 대학과 원하지도 않는 과에 정을 붙이지 못해 늘 도서관에서 살았으며, 융에 빠져 지냈다. 융의 책은 늘 판타지소설 같고 마법이야기 같아 보기에 좋았다. 융이 최고의 심리학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융은 중요한 것은 단 하나도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나는 한축에는 실존주의, 그리고 다른 축에는 선불교와 크리슈나무르티 등을 마치 대립항처럼 놓은 채 그저 표류하고만 있었다.


부질없는 사건들만큼이나 부질없는 고통들도 많았던 계절들을 넘어가 차라리 한참 뒤로 시선을 돌려보자.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등의 피씨통신의 커뮤니티들에서 나름 글 좀 쓸 줄 아는 사람으로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에도 현실은 여지없이 내 자신의 무력함을 알려오곤 했다.


열심히 자격증도 따고 준비를 해나갔지만 취업이 너무나 어려웠다. 면접에서 떨어질수록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민망하기만 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생각들은 다시금 상기되었다.


"나에게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너무나 지친 어느 날 주저 앉으며 내 입에서 나온 소리다.


그리고 불현듯 다음과 같은 생각이 올라왔다.


"되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일이 없었나 혹시?"


머리에 전구가 켜진 순간이다.


나는 분명히 이해했다.


되는 일이 없던 것이 아니다. 그런 일들을 나는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처음으로 그 질문이 가장 순수하게 내 자신을 향했다.


나 같이 불우하고, 늘 고통 속에서 살아왔으며,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엄청 많지 않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 그 사람들과 같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을 것만 같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가 머리에 스쳤다.


심리상담.


한국에서 이런 것이 직업으로 가능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직업이 있었고, 직업의 역량을 익힐 수 있는 교육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거침이 없었다.


대학원 입시를 기다리며 나는 심리학 교재출판사인 학지사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편집부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심리학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며, 기대 이상으로 나는 충족되었다. 당시 출간되어 있던 심리학 기초교과서들을 성실하게 거의 다 탐독해나갔다. 읽는 일이 너무나 기뻐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운명처럼 칼 로저스를 만나게 되었다.


오제은 교수님이 번역하신 『사람중심상담』 원고를 편집하게 되면서, 나는 3페이지만에 눈물을 쏟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듣고 싶었던 모든 말이 거기에 다 쓰여 있었다.


나는 원피스를 찾은 루피였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눈물은 기존의 눈물자국 위로 범람하며 이 몸이 가물지 않게 하였다. 울면서 빨간 펜을 들고 맞춤법을 수정하는 모습은 더욱 안쓰러우면서 절박했다. 왠지 모르게 자신이 좀 사랑스러워진 것도 같았다.


심리상담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은 자신은 분명하게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켄 윌버의 『통합심리학』 원고를 읽게 되면서 내 진로는 명확하게 정해졌다.


요즘은 심리학에서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이야기를 학술적 소재로 다루는구나!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은 내 희망이었다.


지금은 융과 윌버에게 가장 반대하지만, 그때는 그것들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가능성이었다.


2007년에 대학원 석사과정으로 들어가, 2014년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만 말해두는 것이 좋다. 방황이 끝났던 것도 아니다. 더욱 방황했다.


마포구 일대를 방황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일종의 정신적 지주처럼 떠올려진 적도 있다. 소음기를 탈거한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을 소란스럽게 하는 아이들은 나를 만나면 인사를 하며 함께 맞담배를 피웠고, 한강에 가서 불꽃놀이를 했으며, 집에 가기 싫다고 선생님 집에서 같이 살면 안되냐고 조르곤 했다.


나는 아무 것도 구원할 힘이 없고, 무력했으며, 끝내는 상담활동을 잠시 접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나는 수련을 하고, 교육분석을 받으며, 성실한 심리상담자가 되겠다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단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에 빠져 살았던 만큼, 이야기치료사, 문학치료사, 독서치료사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중고등학교들, 도서관들, 청소년수련관들, 여기저기에서 불러주는 곳들이 많은 인기치유자였다.


내 자신을 위한 특별한 이야기를 통해 특별한 내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나는 그런 내러티브의 작법을 사랑했다.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바로 그 믿음이, 심리상담자가 되는 길에서의 지난한 방황과 패착을 만들어내게 된 이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고집을 비로소 멈출 수 있게 된 것은, 한 선사(禪師)분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7개월의 짧은 만남 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그 분의 하관식 때 나는 웃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미쳤다고 웃음이 나왔다. 허탈해서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랑받은 적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웃다가 통곡했다.


사실 가장 그윽했던 시간은 조금 더 전이다. 내가 문을 열고 한 자리에 닿았을 때 그는 이미 그 사실을 알았다.


다음 날 나를 찾아와 웃으며 이제 말해보라고 했고, 나는 옆에 있던 콜라캔을 꽉 잡아 꾸기며 말했다.


"이렇게 당연한 건데, 왜 이걸 모르고 살았는지 오히려 그게 너무 이상해요. 존재한다는 걸 몰라 다들 이야기로 대신 자기가 존재하는 척하는군요."


그건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고, 매일 밤 금강경을 설해주듯 그와의 전화통화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한 시간은 내 상담의 시간이 되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는 시간, 내담자들이 그렇게 보고할 때, 나는 이러한 상담의 형태에 실존상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실존상담이란 상담접근은 원래 그러한 것이었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심리상담 활동을 시작해 현재 15년차의 상담자가 되었고, 일반적인 평균치보다는 조금 많은 1000케이스 이상의 상담을 진행해오는 동안 분명해진 것이 있다.


상담의 핵심은 절대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담의 핵심은 존재다.


"공감은 그 사람의 존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말을 들려주신 자아초월심리학의 교수님의 수업을 이제는 내가 맡아 대학원생분들에게 같은 말을 들려드린다.


스즈키 선사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곤 했다.


"당신은 왜 당신의 존재를 미안해하죠?"


자신의 존재가 수치스러운 이들이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든 존재를 정당화해보고자 시도한다. 그 의도는 애잔하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실은 그럴수록 더욱 자신이 비루하게만 된다. 안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하려는 고집만 강해진다.


나도 기억할 수 있는 바로는 어린 시절부터 최소 25년간 그러한 일만을 해왔다.


다른 무엇보다 바로 그 일이 고통의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어떠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다. 도달하면 언제나 그 밖에는 더 거대한 것이 있었다.


사람은 지금도 두렵고 낯설기만 하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다는 이 사실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존재는 이야기를 불허하며, 다만 존재한다. 다만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차고도 넘친다.


그 차고 넘치는 것을 '나'라고 부를 것이다.


무수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 그것을 나라고 믿고 있던 시절, 내가 나를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 시절에 그 어디에도 사실 나는 없었다.


엄마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없어서 나는 무척이나 외로웠다.


내가 없기에 나에 대한 이야기를 대신 나로 삼고 있어서 나는 더욱 외로워졌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이는, 사랑할 수 있는 나라는 것을 내가 찾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다만 그를 향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차고 넘치고 있었으며,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야기가 다 사라진 곳에서 비로소 나를 찾았다.


그래서 이것은 최후의 스토리텔링이다.


이 기나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 하나도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이 마음, 이것일 뿐이다.


이처럼 지루한 스토리텔링을 통해서나마, 내가 당신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외로움 속에서 찾고 있던 모든 그것이며,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아픔 속에서 물어왔던 모든 질문의 그 대답이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눈물과 동행하고 있던 그 존재다.


그 눈물방울의 개수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그 존재다.


문득 그 미소가 눈치채어진 전율에 고개를 돌리려는 그 순간, 그것을 향하는 즉시 다 사라져 그것만 남은 바로 그 찰나에, 나는 반드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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