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NMS #2

"스토리로 살면 왜 못나지는가?"

by 깨닫는마음씨


photo-gummy-bear-02-805x805.jpg?type=w1600



우리가 왜 자꾸 자신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며 스토리로 살고자 하는지의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 것도 아니느니 무엇이라도 되고 싶어서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something이어야 하고 그게 심지어 badthing이어도 된다. nothing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와 불안이라는 실존주의적 주제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정확히는 우리가 실존적으로 사는 일을 회피하고 있을 때 드러나는 양상이다.


자유는 전적으로 nothing에서 나온다. 실존주의는 nothing이야말로 자유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말해왔다. nothing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럴 때 자유는 불안으로 바뀌어 우리에게 경험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nothing은 너무 불안해. ㅜㅜ"


그래서 something이기를 강박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와 싸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투쟁자들에게 스토리라고 하는 것은 아주 든든한 요새와 같다.


스토리는 그것을 채택한 이에게 '배역'을 하사해준다. 스토리로 살아가는 이에게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something이 된 것이다!


존재의 자유를 격렬하게 거부하고 something이 되기 위해 추구하는 것이 스토리라고 하면 분명하다.


그러나 스토리를 예찬하는 이들은 반대로 말하기도 한다. 스토리는 개인을 something으로 한정해서 가두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가능성을 개인이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돕는다고도 말한다.


쉽게 말해, 다양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소비함에 따라 더 다양한 개인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대표적으로 자유를 착각하는 방식이다.


이는 anything에 대한 얘기다.


그리고 anything과 something은 똑같은 뜻이다!


어떤 하나의 '무엇'이 되는 것과, 자유롭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은 똑같은 '무엇'일 뿐이다.


something에서 anything으로 이행되는 것을 스토리 예찬론자들은 자유의 발달이라고 철저하게 왜곡시킨다. 어떻게든 nothing을 은폐하기 위함이다.


스토리는 nothing을 싫어한다. nothing은 모든 스토리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달려가려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문득 로미오는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한다.


"귀찮다. 어떻게 하든 나는 죽을텐데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다 관둘란다."


그렇게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하던 중 로미오는 마차에 치여 죽는다. 그 얼굴은 그럭저럭 평이했다.


여기에는 아무 감흥도 교훈도 없다. 스토리가 아니다. 이런 것을 썼다면 셰익스피어의 권위는 없다.


nothing이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의 속성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일은 매우 좋다.


삶은 그냥 그렇고 그런 것이지, 무슨 극적인 감흥과 교훈이 있는 작위적 스토리가 아니다.


물론 그냥 그렇고 그런 것은 사실 엄청 대단한 것이다. 스토리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삶의 근본속성인 이 nothing이야말로 우리에게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nothing이라는 것은 잘난 것도 아니고 못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nothing은 우리가 결코 못난 존재일 수 없다는 그 존재의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은 잘나기도 하고 못나기도 한 anything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 상대적인 것들과 아예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nothing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상대적인 비교의 세계를 떠나, 절대적인 감각을 얻게 된다.


nothing은 존재의 절대성에 대한 표현이다.


스토리는 분명 이러한 절대성을 싫어한다.


스토리는 못난 것이 잘난 것으로 발달하는 과정을 좋아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스토리텔링을 할 때를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못났던 자신이 고통을 버텨내어 결국에는 놀라운 자신이 되었다는 내용들이다.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살아, 라는 말은 덤이다.


이처럼 스토리는 못남과 잘남 사이의 인과론으로 구성된다. 모든 스토리는 인과론적 발달의 스토리다.


그런데 nothing은 언제나 인과론을 붕괴시킨다.


오해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인과론을 뒤집는다는 말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스토리텔링의 작법은 인과론을 뒤집어 결과를 먼저 배치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신이 최고의 심리상담자가 되고자 하는 스토리텔링을 하는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결과를 미리 끌어와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가 최고의 심리상담자인 척을 한다. 이미 그러한 인물이 된 것처럼 말을 하고 행위를 취한다. 그러면 그는 '기승전결' 또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숏컷으로 그 스토리의 결론을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계발분야와 사이비심리학의 영토에서 이러한 역인과론의 방법론을 마치 성공하는 마법의 기술이라도 되는 양 열심히 팔아대고 있다. SNS 인플루언서가 되는 논리와도 같다.


스토리 예찬자들은 이 역인과론의 기술을 '탈내러티브의 방법'이라고도 선전한다. 이 방법을 쓰는 이는 스토리 안에 갇힌 것이 아니라, 스토리 밖에서 스토리를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마법사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 밖에서 스토리를 조종한다는 내용의 그 신화적 전능성의 스토리텔링이며, 곧 anything의 스토리텔링이다.


신화적 전능성의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이들은 유아적 전능감에 사로잡힌 아동들이다.


아동들은 늘 드래곤볼 만화책을 보다가 상상한다. 드래곤볼이라는 스토리 밖에서 찾아온 제일 강한 초사이어인으로 자기를 상상하며, 그러한 자기를 스토리 안으로 밀어넣는다.


오늘날 범람하는 이세계물은 다 이 구조를 갖고 있다.


스토리 밖에서 찾아온 독자가 스토리 안으로 들어가 그 스토리를 뜻대로 바꾸어내는(개판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는 곧 스토리 밖의 초월자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며, 이러한 스토리텔링을 하는 이는 자기가 그러한 초월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아적 전능감이 만들어낸 가장 유치한 저질의 스토리텔링이다.


누가 이토록 스토리에 대한 초월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일까?


스토리라고 하는 것에 가장 큰 권위를 주고 있기에, 그 자신이 가장 스토리에 갇힌 이가 그러하다.


자기가 지어낸 귀신이야기에 자기도 겁을 먹어 밤길이 무서워진 아동의 모습과 같다.


아동이라는 이 키워드는 대단히 중요하다.


스토리텔링은 못남에서 잘남을 향하는 인과론적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앞서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말해주는 진짜 의미는, 스토리텔링에 집착하는 이들은 사실 못남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다. 이것은 인과론이다.


잘나지려면 먼저 못나야 한다.


못나야만 잘남이라는 것이 추구될 수 있으며, 실현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스토리텔링하고 있는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의 못남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역인과론의 기술을 활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성공적으로 될 수 있다고 믿는 초월자를 추구하는 이가 집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동이다.


이것은 일종의 소아성애다.


그리고 이 소아성애는 굴절된 자기애다.


못났던 자신이 잘난 자신으로 드러나는 스토리텔링에 집착하는 이는, 작고 약하고 못난 것, 즉 자기가 생각하는 아동기의 자기 모습에 대한 성애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일그러진 성애를 은폐하기 위해 스토리 예찬자들이 또한 많이 쓰는 방식은, 우리가 못남에서 잘남을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잘남도 온전하고 못남도 온전하다는 것을 동등하게 알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다. 그것이 스토리를 초월해 그 스토리를 사랑하는 진정한 방식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 또한 바로 그러한 스토리텔링일 뿐이다.


못남과 잘남을 다 온전하게 알아주는 이,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이다.


이러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이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존재라는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베지터의 못남과 카카로트의 잘남을 다 온전하게 알아주려는 그 실체는 가장 유치한 아동이다.


베지터는 못났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또 잘나기도 했고, 카카로트는 잘났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로 또 못나기도 했고, 인간이 다 이처럼 잘나기도 하고 못나기도 한 온전한 존재라며 흐뭇해하는 이는 그 심대한 유치함으로 자위까지 하고 있는 아동이다. 자기애적 소아성애라고 말해보자.


자기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계속 하고 있으면, 심지어 역인과론의 형태로 '주술적 스토리텔링'까지 하고 있다면, 이 미발달 및 퇴행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기술적으로 닦아온 언어로는 성숙한 척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심리적 상태는 속일 수 없다.


왜 그런가?


우리 삶의 근간에는 늘 nothing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술적 스토리텔링을 하는 이들이 양치기소년처럼 그 행위를 멈추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자기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면 할수록 실은 nothing을 직감하게 되어서다.


자기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어낼수록 자신은 텅빈 것처럼 경험된다.


불안하고 무섭다.


그러니 더 크고 센 스토리를 찾아 갑옷처럼 자기에게 입혀야 한다. 하지만 껍데기가 두꺼워질수록 내면의 공동은 더 크게만 체감된다. 악순환이다.


작고 약하고 못난 자기는 nothing처럼 느껴졌다. nothing은 가장 못난 것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 nothing의 못남에서 벗어나 something의 잘남을 얻으려 했고, 나아가 anything의 가장 높은 잘남을 얻으려 했다.


그리고는 nothing이기에 anything일 수 있는 것이라며, anything으로 살아가는 자신은 이미 nothing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며, nothing을 관념적 차원의 것으로 바꾸어 교묘하게 회피하려고 했다.


이처럼 자기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는 이들이 절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의 못남이다.


그러나 스토리의 작법에서는 자기의 못남을 늘 대상으로 삼아야 인과론적으로 자기의 잘남을 성취할 수 있기에, 이들은 한편 자기의 못남에 집착하는 것이기도 했다.


싫어하면서도 집착하고 있는 것, 이 분열이 결국 자기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는 이들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분열된 삶이 스토리텔링에의 과잉된 의지를 낳는다.


삶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단순하게 nothing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이 의미를 되새겨보자.


nothing은 not thing이다.


그 어떤 사물[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라는 그 뜻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물이 아니기에 상대적 비교 속에 위치하지 않는다.


잘나면서 또 못난 것이 아니라,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 것들과 아무 관계없는 것이다.


something? anything? 다 사물이 되겠다는 얘기다.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가 일부러 못난 것이 되겠다는 소리다.


놀라운 스토리텔링으로 큰 돈을 벌고 있다고 유튜브나 SNS 등지에서 자기를 선전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봐보자. 그들은 실제로 어떠한 상태인가?


계속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컨텐츠를 짜내느라 죽을 맛이다. 한 사람의 팔로워라도 떨어져 나갈까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무수한 구독자들을 거느린 인기유튜버들을 상담해보면 다 중증의 우울증이다.


행복한 척하는 스토리텔링을 계속 쓰고 있을 뿐, 실제로 그들은 행복하지 않다.


사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 공장과도 같다. 기계장치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지 않다고 저렇게 살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더 본질적으로, 어떻든 간에 우리는 죽을텐데 행복하지도 않은 삶을 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nothing을 산다는 것은 이러한 감수성으로 사는 일이다.


가장 쉽게는 내 몸을 산다고 표현할 수 있다.


생명이 꺼지면 인간의 몸은 사물이 된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 몸만이 우리를 사물로부터 변별시켜주는 소재인 것이다.


내 생각이 아니다. 내 몸은 대체 어떨 때 행복해하는가?


떠올려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몸이 행복한 조건은 결코 크지 않다. 실현하는 일이 절대로 어렵지 않다. 행복은 우리의 생각보다 언제나 쉽다.


그리고 이 쉽고도 진짜인 행복을 살아가는 감각이 바로 nothing의 삶이다.


이것은 스토리 밖의 초월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스토리에 집착하는 아동이 되는 것이 아니다.


몸에 성숙해지는 것이고, 곧 몸이 성숙해지는 것이며, 그렇게 성숙한 몸의 인간으로 사는 일일 뿐이다.


자기 몸을 부정하는 이들이 다른 몸에 대한 열등감을 갖게 되고, 머리로 스토리를 짜내 '몸들'을 지배하려고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의 몸은 더욱 열등해지고 스스로가 한층 더 못나게 경험될 뿐이다. 사물화하려고 하면 그 자신도 사물이 되는 까닭이다.


자기를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대상화해서 사물로 만드는 방식, 그럼으로써 인간인 우리 자신이 스스로 못나지게 되는 방식, 이 아동의 방식은 이제 깊이 재고될 필요가 있다.




nms.JPG?type=w1600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 마음의 NM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