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어떻게 사이비종교적 소재가 되었나?"
『착한 심리학』은 우리 주변에 심리학으로 위장한 다양한 사이비현상들을 파헤치려는 목적을 가진 연작글입니다.
먼저 이 사이비현상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해보자면 '이상한 것을 열광적으로 믿는 일'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컬트(cult)라고도 부릅니다.
예전에는 종교라는 소재가 이 컬트를 이루는 주요한 부분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다릅니다.
이제는 종교라고 하면 누구나 이상한 것으로 봅니다. 이 인식이 보편적입니다. 무종교 시대이니만큼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 종교를 대신해 컬트의 핵심적인 소재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심리학입니다. 가장 많은 사이비현상들이 취하고 있는 외연 역시도 심리학입니다.
최면, NLP, EFT, 멘탈리스트, 호오포노포노, 점성학 등의 오컬트들이 다 심리학으로 포장된 채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사이비심리학(pseudo-psychology)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와 같이 심리학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것이 심리학처럼 소비되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재는 바로 MBTI입니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만큼이나 근거가 없지만 그것이 마치 정확한 심리학인 것처럼 매우 자주 인식되곤 합니다. 물론 MBTI는 재미를 위해 향유되는 유행의 풍조에 더 가깝습니다.
MBTI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바꾸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는 이는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이비심리학을 소비하는 이들은 바로 그러한 다부진 의지를 갖고 그것들을 소비하곤 합니다. 이 양상은 정말로 사이비종교에 빠진 모습과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이상한 것을 심각하게 믿으며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결과가 곧잘 야기됩니다.
과거에 사이비종교가 점하고 있던 영토를 지금은 사이비심리학이 점유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정확합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일까요?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상'이라는 단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상(理想)은 이상(異常)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의 국룰입니다.
정신의 이상(理想)이 높은 이들이 정신이 이상(異常)해집니다.
이상한 것을 믿으며 사이비심리학을 소비하는 이들을 보면, 모든 사이비현상에 빠진 이들이 그러하듯이 결코 지적 수준이 낮지 않습니다. 높은 학벌과 평균 이상의 정보권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상한 것에 빠집니다.
이것은 지적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 정신적 이상(理想)이 높다는 사실과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정신적 이상이 높다는 말을 더 쉽게 '자아상이 크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자아상을 정해놓고는 그것을 자기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현실과 자주 충돌하게 됩니다. 더 높은 이상적 자아상을 설정한 만큼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실제 자신의 모습과의 괴리감은 더욱 크게 느껴지게 되며, 그 간극이 만들어낸 심리적 갈등의 수위는 한층 높아집니다.
이는 결국 '이상적 자기'와 '현실적 자기' 사이의 분열로 인한 갈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SNS와 개인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또 그로 인한 가상현실의 확장으로 인해, 개인 안에 '이상적 자기'가 과잉되게 팽창되어 있곤 합니다. 인스타에 조작해서 올린 자기의 멋진 모습을 실제의 자기라고 믿고 싶어하며, 현실에서는 더욱더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아집니다.
'가상현실'과 '실제현실'과의 중요성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며, 이는 또한 '이상적 자기'와 '현실적 자기' 사이의 역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꿈으로 부풀려낸 뻥튀기 같은 이상적 자아상을 추구하는 것이 심지어는 시대의 미덕처럼 권장되기까지 합니다.
저마다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며, 그러면 여러분도 성공한 자기처럼 될 수 있다며, 철없는 연예인들과 인플루언서라는 이들이 이 '자아팽창'을 매일같이 조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팽창되어버린 자아상은 결코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상적 자아상을 추구하고 있는 한 언제나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통뿐입니다.
불안, 두려움, 죄책감, 무능력감, 무기력, 조바심, 시기, 질투, 분노, 증오, 원망 등의 증세에 종합적으로 시달리며, 개인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사이비심리학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달콤한 유혹으로 작용합니다.
"당신이 원하던 당신의 모습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법'의 선전입니다.
관자놀이와 손목을 반복적으로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자신이 얼마나 약했던지를 온전한 것으로 수용하고, 또 그 약함 속에서도 얼마나 상냥한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며, 이제 그 온후한 마음가짐으로 진실된 자신의 소망을 바라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이러한 종류의 것들은 다 마법입니다.
사람들이 단체로 어떤 골방에 모여 앉아, 자기들의 이마와 손목 등을 손가락으로 열심히 두드리며, 누군가는 눈물도 흘리고, 또 누군가는 땀까지 흘려가며 심각하고 중대하게 그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매우 이상해보이는 모습입니다.
정말로 이상합니다.
어떻게 저런 것을 할 수 있을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을 때는 그것들이 조금도 이상하게 경험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행위의 주체들은 자기들이 세상사람들보다 더 좋고 더 진정한 것을 하고 있다고 인식하곤 합니다.
이것이 사이비현상의 핵심적인 특성입니다. 집단의식에의 동화라고 말해도 좋고, 집단최면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주변환경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맞추려는 성질을 갖습니다. 모두가 외눈박이라면 자기도 한쪽 눈을 감습니다. 그래야 이상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자기 혼자만 이상해지지 않으려고 그들과 똑같이 되려고 한 그 결과로 그는 정확하게 이상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이상해졌으면 이제 벗어나기가 어려워집니다.
벗어나면 자기가 이상했다는 것이 너무나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지부조화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활용한 집단최면의 기제를 통해 사이비심리학은 세를 점차 확장해나갑니다.
이는 '가상현실의 확장'입니다.
사이비현상에 빠진 이들은 '공통의 환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환상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을 더욱 증축하기 위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 또한 자기들의 공동체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이러한 '전도'가 일어나는 이유 또한 수치심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이상한 것을 함께하고 있으면 자기의 수치심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없애고 싶어하는 인간의 의지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합니다.
사이비현상이 수치심에서 시작되어 수치심으로 전염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이상적 자기'의 모습이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아 먼저 개인은 수치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수치심을 극복하고 우회하기 위해 사이비심리학의 소재를 소비하려 한 결과 그는 더 이상해져서 더 큰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이들도 자기처럼 만들어 그 수치심을 희석시키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인류의 정신적 이상(理想)이 높았던 시기를 근대라고 부릅니다.
이때 인류는 정신이 이상(異常)했습니다. 집단광기의 정신병이었습니다. 더 많은 이념의 신도를 만들기 위해 제국주의의 전도를 자행하고, 이념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가스실에 밀어넣으며 웃음짓고 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사이비심리학의 가장 큰 문제는 분명 이 배타성입니다.
타자를 인정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타자를 무시하고 그 타자성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아주 교묘하게 이루어집니다.
타자를 착한 아이처럼 '알아주는' 행위를 통해 타자에 대한 심리적 권위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이 일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타자의 타자성을 가장 짓밟는 행위입니다.
사이비현상의 핵심이 수치심인 만큼, 사이비현상에 동화되어 있는 주체들은 자기들의 수치심을 보상하기 위한 우월감을 발달시킵니다. 아들러는 이것을 '병적 우월감'이라고 부릅니다. 병적 우월감이 팽배한 사회에는 늘 분열과 혐오의 갈등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깨어있는 선비흉내를 내던 이들에게 팽배했던 것이 바로 이 병적 우월감입니다. 고고하게 자기 자신은 윤리적으로 대단히 높은 인물인 척하며, 실은 자신의 정신적 이상이 얼마나 우월한지만을 선전해왔던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긴 시간 동안 정신적 이상을 과도하게 숭상하는 유교문화권 속에 있었고, 또 발달의 과정을 건너뛴 채 민주사회인 것처럼 그 외연만을 이루었기에, 어찌보면 사이비현상에 근본적인 취약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오늘날 정보의 범람으로 관념적인 행복의 기준은 높아지고 그 행복을 당연히 자기의 것으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아상도 함께 커졌기에, 우리는 여러모로 사이비현상에 취약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나 사이비심리학은 가볍고 재미있는 '과학적 소재'인 것처럼 위장해 우리의 취약성을 파고들기에 조금 더 경계되어야 할 주제임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실용적으로 유익한 이해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만 그렇게 못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환상'으로 마치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진짜가 아닙니다. 다 환상입니다.
사이비심리학의 교주도 그 신도들과 똑같습니다. 정신의 이상(理想)이 높아 정신이 이상(異常)해진 이들입니다.
원래 정신이 몸을 떠나면 이상해지며, 또한 정신이 몸을 떠나고자 이상해집니다.
이상한 것은 꿈속에서밖에 살 수 없습니다. 사이비심리학의 소비자들은 이처럼 현실세계과 그 근간인 자신의 몸을 떠나고자 하는 가상현실의 꿈을 꾸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면, 사이비현상에 쉬이 빠지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는 일의 기초는 자신의 몸을 가만히 좀 두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괜히 여기저기 두드리거나, 이상한 한약을 먹고 발작을 하며, 몸을 특정한 정신성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착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몸을 이상하게 다룬다고 느껴지는 것을 멀리 하면 언제나 가장 좋습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게 옷을 이상하게 입고 다니는 이들과도 멀어지면 금상첨화입니다.
사이비종교와 마찬가지로, 자기 몸을 신뢰하면 결코 빠질 일이 없는 것이 사이비심리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