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욕망 감당할 수 있겠니?"
이 글은 어찌보면 사이비를 위한 글입니다. 사이비에 빠진 이들만이 아니라 사이비들 또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대체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그것을 소망합니다.
때문에 그렇게 소망되어 이루어진 것은 우리에게 매우 자주 커다란 고통의 이유가 되곤 합니다.
사이비들은 거의 언제나 연예인처럼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현실을 소망합니다. 사이비들에게는 존재의 수치심에서 비롯한 열등감이 깊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에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동안에만 자기의 존재감을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호적인 시선이 아니라면 차라리 비난의 시선이라도 받아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모종의 '관심'이 자기에게 향해져야 자기는 존재할 수 있다고 이들은 거의 무의식적 차원에서 굳게 믿습니다.
사이비들이 이처럼 자기의 존재에 취약하기에, 이들은 늘 '존재'라는 것을 더욱더 작은 것으로 취급하려고 시도합니다.
글을 쓰면 자기의 존재감이 생긴다느니, 이야기를 통해 자기의 존재상태를 변화시킨다느니, 마법적 방법론을 통해 존재를 통제한다느니 등과 같이, 사이비들은 언제나 존재에 대한 '주술적 의도'를 갖습니다.
사이비들에게는 존재가 너무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가장 뿌리깊은 세계수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존재의 견고함이 이들에게는 거의 공포의 대상입니다.
깨달은 이들, 그리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성실한 인류는 이 든든한 존재의 사실을 자신의 힘이자 근거로 삼는 반면에, 사이비들은 이러한 존재의 사실을 회피하고 부정하기 위해 별의별 이상한 방편들을 다 동원하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방편이 바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타인의 관심을 획득하려는 전략입니다.
이들은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돌멩이를 따듯하고 친절한 관심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 돌멩이가 황금으로 변할 수 있다는 연금술의 마법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인생을 걸고 우호적인 시선으로 평생 돌멩이를 바라본다고 해서 돌멩이가 황금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80억의 인류가 마음먹고 그 일을 한다고 해도 돌멩이는 황금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중력과 같이 이것은 엄연한 우주의 사실입니다.
존재는 이러한 사실법칙으로 존재합니다.
가상으로 존재하거나, 우리가 이야기로 만들어내서 존재하지 않고, 진짜로 존재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바로 이 정도입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만큼 엄연한 정당성으로 존재합니다.
마음을 배운다는 것은 이러한 존재를 이해해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존재이며, 심리학은 어떤 의미로는 존재에 대한 연구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존재를 두려워하는 사이비들은 결국 마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두려워서 사이비들은 마음에 대해 자꾸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조금 더 초보적인 이들은 마음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는 주술놀이를 하고, 조금 더 노련해진 이들은 이제 마음을 품고 알아줄 수 있는 '마음보다 큰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마치 마음에 대한 부모의 입장 같은 것이 되어 더 교묘해진 방식으로 마음을 통제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이비의 가장 큰 욕망의 내용입니다.
사이비는 더는 마음 때문에 힘들거나 고뇌하지 않도록 마음에 영향받지 않는 모습이 되어 마음을 떠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몸의 작용입니다. 그러니 사이비는 또한 몸을 떠나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을 떠나고 싶어하고, 몸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이 말은 결국 사이비는 존재를 떠나고 싶어한다는 뜻입니다.
존재를 떠나고 싶어하는 욕망은 언제나 커다란 풍선처럼 허공을 향하는 움직임을 갖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거대한 욕망은 가상현실 속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가상현실은 욕망을 위해 창조된 공간입니다.
사이비는 자신이 갖는 이 '존재탈출'의 욕망과 동일한 욕망을 갖고 있는 이들을 끌어들입니다.
자기가 먼저 자상하고 친절한 시선을 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동일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기획합니다.
그렇게 서로가 우호적인 관심으로 서로를 황금으로 봐주면, 서로의 몸이 점점 떠올라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저 하늘로 승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이비와 사이비에 빠진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매트릭스의 환상입니다. 다른 말로는 관계의 환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끝에는 절망밖에는 놓여 있지 않은 가장 암울한 환상입니다.
풍선이 아무리 핑크빛으로 보이더라도, 그 뱡향은 미래가 아닙니다.
풍선은 가장 세차게 땅으로 추락하기 위해 떠오르는 것일 뿐입니다.
심지어 그 풍선은 사이비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풍선껌에 불과합니다.
사이비는 풍선껌을 불듯이 입으로 뻥을 불어댑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인생에서 성공하고 마음을 잘 아는 방법'이라며 풍선껌 부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이비는 결국 그 자신이 풍선껌 자체가 되어갑니다.
사이비 자신과 사람들이 합세해서 부풀린 가장 큰 허구의 존재가 되어갑니다.
이 지점에서 사이비는 자기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또는 자기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동원해, 이처럼 크고 멋진 자신의 모습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이비는 지금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관심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이비 자신은 관심의 힘을 무상으로 동원해서, 아무 자본과 능력이 없는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환호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이비에게 관심을 공급한 이들은 채권자와 같습니다. 그들은 부풀어오른 풍선껌과 같은 사이비에게 이렇게 묵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니가 얻은 것과 똑같은 것을 나에게도 내놓도록 해. 내 도움으로 네가 커졌으니 내 모습도 똑같이 만들어내."
또 다른 채권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멈추지 말고 계속 더 커져. 멈추면 배신이야."
사이비는 정말로 모르고 있습니다.
남의 관심을 끌어다가 자기의 힘과 권위로 삼는 일은 공짜이기는 커녕, 아주 고액의 이자를 납부해야 하는 빚이라는 사실을.
관심의 사채, 이것은 사채 중에서도 가장 골수까지 뽑아먹는 사채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얻어 성공한 연예인들이, 자기 생활이 없고, 자기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다며 징징대는 것을 보면 조금 황당합니다.
남의 관심을 빌려 쓴다는 것은 원래 그러한 일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고, 사람들의 욕망이 그리는 그 이미지가 되는 일입니다.
애초에 자신이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자극해서 성공해놓고, 이제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적당히 하라고 말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일입니다.
욕망에는 원래 적당한 끝이 없습니다.
채워지지 않고, 끝을 모르는 것이 욕망의 속성입니다.
사이비의 모든 문제는 인간의 욕망을 우습게 여기는 데서 비롯합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인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인류 중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한번 일어난 욕망은 거센 불과 같아 스스로 소화될 때까지는 그 불길을 잡을 수 없습니다. 현인들은 그래서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쪽으로 안내하거나, 욕망이 출현하기 전 단순한 필요의 문제로 안내하곤 했습니다.
가상화폐 시장의 문제를 일으킨 주체가 왜 그리 죽일 놈 취급을 받는지의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의 성공을 위해 남의 욕망을 함부로 자극했으면 그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사이비는 이처럼 자기가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을 너무나 쉽게 건드립니다. 심지어 그것이 마치 자기만 알고 있는 특별한 성공법칙인 것처럼 간주하며 신나서 그 일을 합니다.
정말로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사이비입니다.
사기를 치는 이들은 자기가 놀라운 언어의 힘과 이야기의 마법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형의 빚을 져서 유형의 성공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성공의 크기보다 언제나 갚아야 할 빚의 크기가 더 큽니다.
욕망을 직접적인 소재로 거래한다는 것은 원래 이와 같은 일입니다.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욕망이기에, 갚을 수 없는 빚을 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촉매로 써서 공짜로 황금을 만들어낸다는 팔자좋은 연금술은 없습니다.
화학구조를 변화시키려면 커다란 에너지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빌려왔다면 그건 다 빚입니다.
가상의 예로, 10억 원을 들여 10g의 황금을 만들어낸 이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미 그러한 일 자체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은 결코 그가 공짜로 만들어낸 황금이 아닙니다.
물론 사이비는 10억의 인류에게 적은 액수인 1원씩만 받으면 10억 원이 조달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10억의 인류는 반드시 자신의 몫을 청구합니다. 개인들에게 1원씩 얻더라도 사이비가 갚아야 할 총액이 10억 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이비가 자신에게 1원을 제공해주면 100원으로 돌려받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준다고 사람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했다면, 그의 부채는 1000억 원입니다.
황금 10g을 얻기 위해 1000억을 빚지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부릅니다.
사이비는 자신이 대단히 똑똑한 줄 알지만, 실은 이처럼 가장 어리석은 일만을 합니다.
물론 어떤 사이비는 자신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사이비에게 사람들이 동의한 거래조건은 "나처럼 될 수 있다."였습니다.
사이비가 100명의 사람들에게 10만 원씩 받아 1000만 원을 모은 '나'가 되었다면, 사이비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몫은 1000만 원입니다.
그래야 정당한 거래조건이 성립됩니다.
사이비는 언제나 부당거래를 하기에 사기꾼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이비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기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받은 10만 원만큼은 분명히 돌려주었는데 왜 사람들이 떼를 쓰는지 모르겠다고 순결한 피해자인 척하곤 합니다.
떼를 쓰는 것은 사이비입니다.
사람들은 사이비가 뻥을 친 모습대로 1000만 원을 가진 이가 되기 위해 자기의 10만 원을 내놓은 것이지, 10만 원을 얻기 위해 10만 원을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사이비는 지금 자기가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던 그 거래조건을 일부러 망각하고는 빚을 갚지 않겠다며 사람들에게 떼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이비의 모습은 자기가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을 건드려 놓고, 그 정당한 책임은 무한회피하기만 하는 아동의 모습과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남의 관심을 끌어 쓰는 일은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받는 관심조차도 공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엄청 큰 유전자의 이득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형질이 지속될 수 있다는 이 이득을 위해 부모는 지불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다투는 상황을 묘사해볼 수 있습니다.
"왜 엄마 말대로 내가 살아야 해. 나도 내 인생을 살고 싶다고."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대신 엄마에게 자꾸 관심을 요구하지 마."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함축적인 상황입니다.
사이비는 마치 엄마의 관심을 끌어모으듯이 남의 관심은 공짜로 얻어 자기의 자원으로 삼으려고 하면서, 동시에 자기는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의 인생을 살 것이라고 말하는 이 아동입니다. 이러한 아동이 아동인 상태 그대로 지속되면 사이비의 속성을 갖게 됩니다.
관심받기를 포기하면 간섭받지도 않습니다.
인생의 가장 기초항목인 이 지점부터 이해하지 못하기에 사이비는 총체적으로 인생이 꼬여 있습니다.
욕망의 부채가 그 입가로부터 어마어마한 크기로 부풀어 있습니다.
떨어져 죽거나, 맞아 죽거나, 둘 중의 하나의 운명입니다.
사회적으로는 '먹튀'가 가능한 것처럼 착각되지만, 심리적인 '먹튀'는 불가능합니다.
남의 욕망을 자극해 자기의 힘으로 삼은 이에게는 늘 자기가 자극한 이들의 사념이 달라 붙습니다. 사이비들이 늘 피곤한 행색을 보이곤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현실에서 자꾸만 다른 이들에게 더 주어야 할 것 같은 부채감에 시달립니다. 자기가 실은 엄청난 크기의 심리적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도 눈치채고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도덕장치가 아닙니다.
양심은 심리적 에너지의 계산장치입니다.
개인에게 들어오고 나간 심리적 에너지의 계산이 맞는지를 정확히 비추어주는 것이 양심입니다.
과잉되게 들어온 것이 있다면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양심은 알립니다.
그래야만 적재된 것이 없어 마음이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따르면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그 이유입니다.
장발장 같은 이가 평생 죄인으로 산 것은 자베르 경감이 쫓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평생 그를 쫓은 것은 그의 양심입니다. 왜 양심의 계산을 따르지 않냐고 양심은 장발장에게 끊임없이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양심을 배신합니다.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처럼 행위함으로써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주술적인 몸부림을 칩니다.
어떻게든 빵집 아저씨에게만은 갚지 않으려고, 양심의 계산을 속이기 위해 갖은 노력이란 노력은 다 합니다.
양심은 이처럼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정직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사이비들이 얼마나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는지, 또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나누기 위해 자기가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는지를 보면, 그들이 지금 양심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어떤 애를 쓰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표현을 더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이비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다 양심이 있는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이비는 커다란 풍선껌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려고 하는, 또 다른 이들 자신의 마음도 가리려고 하는 이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 대신에 이상한 내면의 아이들 같은 것을 만든 뒤 그것을 자신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부모처럼 그것을 알아주는 투명한 메타인지적 시선 같은 것을 또 만든 뒤 그것을 진정한 자신이라고도 말합니다.
풍선껌 속의 세상 같은 것입니다.
모든 마음이 이 엄마의 자궁과도 같은 핑크빛 풍선껌 속에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사이비들은 망상합니다.
그러나 풍선 속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은 질식해서 죽게 될 뿐입니다.
모든 것을 죽이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애초 하지 말라고 알리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래서 양심으로 살아가는 이는 현명하게 됩니다.
반면, 욕망을 끝없이 자극해서 얻은 것을 자기의 힘과 권위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이는 어리석습니다.
양심은 존재의 것이고, 욕망은 허구의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양심은 하늘과 땅과 내 자신의 것이고, 욕망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 가상현실만을 둥둥 떠다니는 풍선의 것입니다.
하늘이 하늘이고, 땅이 땅이고, 내 자신이 내 자신일 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망상의 부유함을 꿈꾸며 부유하는 풍선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가장 부자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입니다.
사이비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가 끌어들인 모두를 욕망의 감옥에 갇히게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두었으면 그것을 이루어주어야 할 의무가 사이비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정확한 상거래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사람들을 욕망의 감옥에 가두었으면, 그 안에 가둔 이들의 끝없는 욕망을 그는 반드시 이루어주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이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건대, 관심은 공짜가 아닙니다.
욕망을 자극해 더 많은 관심을 끌어 자기의 자원으로 삼았다면, 그 빚은 천문학적인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빚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사이비들은 풍선을 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빚을 더 큰 빚으로 청산하려는 놀라운 경험의 계획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행운을 빕니다. 떨어지다가 세계수의 가지에 걸릴 수 있기를.
더 좋기로는, 인간을 살리려는 정확한 양심의 중력에 몸을 맡기고, 풍선을 놓아버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