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척해야 여자친구가 생긴다며"
그래서 젊고, 예쁘고, 잘생기고, 사회성도 좋고, 화술도 유창한 이들은 깨달음에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깨달음 같은 것이 없어도 애인을 잘 만들기 때문이다.
부모가 부자이거나, 자신이 돈이 좀 있는 경우도 나쁘지 않다. 성형도 가능하고, 퐁퐁도 집에 많이 사다놓을 수 있다.
아니면 열심히 공부해서 학벌이라도 갖추든가, 열심히 운동해서 몸이라도 가꾸는 편이 낫다. 애인을 얻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넘치는 자원들이다.
정말로 동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성실한 끈기만이라도 있으면 된다. 하나의 태양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는 우리의 생각보다는 훨씬 매력으로 작용하는 소재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이.는. 깨.달.음.을. 꿈.꾼.다.
깨달음은 흡사 최후의 픽업아트인 것만 같다. 인생막장이어도 애인이 생기게 해준다는 궁극의 약속처럼 기대된다.
아무 자원이 없어도 누구나 매력적인 알파개체가 되어 이성을 획득하게 되는 현실이 마치 깨달음의 목적인 것처럼 상정되기도 한다.
이것은 정말이다.
어떠한 체험을 통해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소위 깨달은 척하는 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학교에 앉아 도사인 척하며 더 많은 이성들을 자기 아래 끌어모으고, 온라인 플랫폼들에서 '심리학으로 영화보기' 또는 '심리학 독서모임' 등을 주최하며 자기 곁에 둘 이성들을 선별한다. 심지어는 상담활동을 하며 애인후보를 물색하기도 한다.
자기가 하는 활동에 이성이 오지 않고 동성만 모인다면 이들은 활동의 동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얼굴에 짜증꽃이 만발한다. 그러니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들은 처음부터 이성에게 호소할 수 있는 선전문구들로 사람을 모으곤 한다.
체험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 체험이 어떠한 것을 목적해서 결과로 드러나는가가 유일하게 체험의 의미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그 체험을 통해 목적하는 것이 애인을 만드는 것이라면, 그건 그냥 헌팅의 기술이다.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이 여는 강의나 모임활동에는, 그 주최자와 동일한 특성을 가진 인물들이 대거 참석한다.
아무 것도 없는 자신들도 애인을 만들 수 있는 비법 같은 것을 주최자에게서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픽업아트 수련공동체 같은 것을 형성한다.
그중에 주최자의 취향에 맞는 이는 주최자의 애인이 될 것이고, 나머지는 쌍쌍이 눈이 맞을지도 모르며, 그렇지 않은 이는 진정한 자신의 길을 가겠다며 다른 헌팅의 장을 찾아나설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찌질이들의 모임이다.
깨달음이라는 말이 오늘날 더욱 수상하고 한심하게 들리게 되는 이유는, 깨달은 척하는 이들이 찌질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애인을 얻고 싶고, 또 섹스를 하고 싶을 뿐이면서, 자기는 고대의 지혜에 통달했고, 동서양의 심리학의 비밀을 다 알고 있으며, 또 자기의 인생을 최상위권으로 반전시켜 준 놀라운 경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이들이다.
이처럼 이들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가.장. 작.고. 유.치.하.며. 조.잡.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마치 시골나이트에서 촌부영감이 젊은 여성을 꼬시기 위해 입은 은갈치빛 폴리에스테르 수트 따위의 것으로 전락한다.
물론 몇 번의 놀라운 홈런경험이 있기에, 이 촌부영감들은 깨달은 척하는 이 방식을 고집할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아는 유일한 헌팅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더 나이가 들어 몸이 반응하지 않고, 경건하게 사리나 생산해야 하는 신세가 되기 이전에, 어떻게든 이들은 은갈치 수트를 두르고는 엉덩이를 흔들러 깨달음나이트로 나선다.
그러면 그곳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리생산공장이 될 위기에 처해 조바심을 느끼는 이성을 만날 수 있다. 그이들도 고대의 지혜를 좀 알고, 동서양의 심리학의 비밀도 좀 접했으며, 또 놀라운 경험들도 좀 있다. 바로 그것들을 호소해서 이성을 만나려고 한 또 다른 폴리에스테르 은갈치족들이다.
수요와 공급이 상호적으로 맞아 떨어지면 기쁜 일이다.
섹스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왜 섹스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깨달음을 들먹이며 깨달은 척하고 있는가?
요즘에는 '섹스'의 은어가 '깨달음'인가?
"오빠, 오늘 우리 집 비었는데 와서 라면도 먹고, 고양이도 보고, 깨달음도 할까?"
이것은 어처구니 없이 조금 귀엽다.
그러나 곧 죽어도 자기는 섹스가 아니라 깨달음을 배우고 있다고 고집하는 수많은 '깨달은 척쟁이들'은 많이 지겹다.
이들이 고집을 부리며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신의 열등감이다.
우리가 표현 그대로 섹스라는 활동을 순수하게 누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사실 우리가 그 활동을 통해 소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것은 문.화.사. 속.에.서. 섹.스.에. 아.주. 많.은. 것.들.이. 담.겨.왔.기. 때.문.이.다.
가장 실현하고 싶은 것들과 가장 은폐하고 싶은 것들을 전부 다 담아내며 섹스는 담론화되어 왔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담겨 있는 것은 단연코 열등감이다.
그리고 이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우리는 섹스를 주로 소비한다.
열등감의 근간은 언제나 개인의 몸이다. 그런데 이 모든 열등함의 원천인 자신의 몸이,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다른 누군가의 몸에 받아지는 경험을 했을 때, 이것은 거의 종교적 수용의 기제가 된다.
지금껏 열등감을 방어하기 위해 쌓아온 그 모든 긴장이 한 번에 이완되는 경험이다.
이것은 마법처럼 강렬하다. 자신이 그동안 아무리 머리를 싸매어도 해결되지 않았던 열등감의 문제가 단번에 해소된다. 흡사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
실제로 성적 불만족이 가득한 이들이 종교체험을 경험하는 빈도는 매우 높다.
현재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오르가슴에 대한 지향이 종교적 색채를 띤 '놀라운 경험'으로 승화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섹스중독이 되는 이유도 동일한 이유에서다. 이는 종교적 광신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좋다. 그렇게 간절하다니 하면 된다.
섹스로 열등감을 구원하고 싶다니,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이. 깨.달.음.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가?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어 생겨난 열등감이 있다. 그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한 솔루션으로 꿈꾸어지는 섹스활동이 있다. 또는 섹스를 하지 못해 생긴 성적 불만족의 긴장이 승화되어 생겨난 유사종교체험의 상태들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깨달음은 절대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깨달음을 '더 잘 볼 줄 아는 지성의 권능'이라고 간주하는 착각이 놓여 있다.
결국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깨달은 척하는 이들이 이성에게 호소하고 싶어하는 그 일관된 요소는 무엇인가?
자.신.이. 불.안.하.고. 막.막.한. 상.대.의. 길.을. 환.히. 비.추.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한 앎의 힘'에 대한 얘기다.
김중배의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갖추지 못했으나, 대신 자신은 이 영롱한 지성적 눈빛으로 상대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또 상대가 원하는 것이 실현되는 길을 밝혀줄 수 있다고 이 '앎의 주체'는 선전하곤 한다.
"나와 섹스를 하면 내 놀라운 지성으로 니 인생 잘 풀리게 해줄게."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얘기다. 거의 사이비교주의 말씀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이러한 이들이 자기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놀라운 지성'이나 '신비한 앎의 힘'을 갖추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이들은 어떠한 체험을 통해 자기가 마음에 대해 더 잘 보게 되고, 또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적 욕구를 해소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현자타임의 상태에서는, 누구나 다 이렇게 보게 되고, 이렇게 알게 된다.
실제의 섹스활동을 통해서든, 성적 불만족이 승화되어 찾아온 유사종교체험을 통해서든, 열등감에 대한 긴장이 해소되면 그 전까지 자기방어를 위해서만 몰두해있던 '좁은 시야'의 상태가 해소된다. 그때는 눈앞이 열려 세상이 더 투명하고 넓게 보이게 되는 상태를 경험한다.
이것이 깨달은 척하는 이들이 말하곤 하는 '놀라운 경험'이며 '마음을 잘 아는 법'이다.
성적 욕구불만이 없는 이나, 성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갖지 않고 자연스럽게 성생활을 하고 있는 이는, 원.래. 일.상.적.으.로. 이.렇.게. 보.며. 살.고. 있.다.
이를 더 쉽게 말해볼 수 있다.
열.등.감.으.로. 보.지. 않.는. 이.에.게.는. 원.래. 모.든. 것.이. 잘. 보.인.다.
섹스를 통해, 또는 유사섹스라고도 할 수 있는 유사종교체험을 통해, 실제의 대상에게나 의식속 환상의 대상에게 자신이 다 받아져 잠시 열등감이 해소된 경험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열등감에 대한 근본적인 응답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몸을 받아줄 상대가 있을 때만 비로소 자신은 열등감이 없는 존재인 척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경험을 한 이들은 더욱더 대상에게 집착하게 된다. 대중의 인기를 모으려 하고, 자기 주변에 더 많은 이성을 두려고 한다. 이 모든 잠정적 섹스후보자들이 사라지면, 자기는 다시 열등한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아서다.
이는 엄마와 아이의 관계역동을 우리에게 되살피게 한다.
아이의 몸이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지속될수록, 아이에게는 열등감이 발달한다.
열.등.감.은. 자.신.이. 자.신.의. 몸.에. 대.해. 무.력.하.다.는. 그. 감.각.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이러한 아이를 더 가득 안아줌으로써 아이가 더 크게 수용받는 경험을 해야 열등감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나와, 엄마와 건강하게 분리되어야, 아이의 열등감은 점차 사라진다.
여기에는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분리'가 필요하다.
이것을 우리는 '탈자적 감수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전까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떠나는 것이 탈자(脫自)의 모습이다.
이 '탈자'의 다른 이름을 '실존'이라고 부른다. '실존'의 핵심적 의미는 그래서 '탈존'이다.
자.기.를. 넘.어.서. 존.재.를. 향.하.는. 바.로. 이. 일.이. 깨.달.음.의. 운.동.이.다.
차라리 농담처럼 비유하자면, 깨달음은 존재와 섹스하러 떠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이 낭떠러지에서 추락하지 않도록 그 마음을 알아주고 비추어줌으로써 그것이 존재하게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그 마음으로 낭떠러지를 건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존재하며, 존재를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오빠가 내 마음 다 알아줘서 해냈어. ㅜㅜ 우리 오늘 라면 먹고, 고양이도 보고, 깨달음도 할까?"
이것이 아니다.
"자, 아무 것도 없어 가벼워졌으니 이제 뛰어넘어 볼까!"
이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이.는. 진.실.로. 깨.달.음.을. 꿈.꾼.다.
자기라는 골짜기를 훌쩍 뛰어넘어 존재의 지평에 닿기를 꿈꾼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진짜 섹스라는 것을 이해하겠는가?
상대를 의존해서 자기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상대에게 가장 무거운 그 짐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다 버리고, 그러한 자기도 잊은 채, 다만 눈앞에 존재하는 상대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계산도 없고, 획책도 없으며,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모든 것을 영접하려는 그 아름다운 몸짓만이 있다.
깨.달.음.은. 너.에.게. 나.를. 보.내.는. 일.이.다.
존재가 우리에게 그렇게 했고, 이제 우리가 한다.
존재는 우리의 단 하나뿐인 애인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