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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투 Aug 13. 2018

그러고 보니 처음이다

그날은 조금 이상한 하루였다.

출근 후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해가 떴다.

비도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그사이로 햇살도 수줍게 가 아닌 강렬하게 빛을 뿜었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


우리는 출퇴근 카드 대신에 차량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으로 출퇴근을 '인증'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인증을 요청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계속 거부되었다.

결국 출근시간을 넘겨버렸다.

지각.

이런 경우는..

그러고 보니 처음이었다.


처음엔 기기 이상인 줄 알았고,

그래서 메모리카드도 뺐다가 유심칩을 빼보기도 하고.. 전원을 꺼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혹시 사 번을 잘못 입력했나 싶어서 확인하려고 보니, 갑자기 사번이 '뭐였더라...?'하며 가물가물해졌다.

매일 습관적으로 입력하던 사번에 대한 확신이 떨어졌다.

'치맨가...'

불안한 마음에 사무실에 연락을 취해 사번을 확인하기까지 이르렀고...

다행히 아직 치매는 아닌 것 같았지만 찜찜함이 남았다.


나중에 알게 된 원인은, 전날 운전자가 종료 처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의 사번으로 다시 인증을 받아 종료를 하고, 다시 내 사번으로 인증을 진행해야 된다.

덕분에 30분 이상을 까먹고 운행을 시작했다.

덕분에 그 사이 비가 그쳐 비는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이용객의 목적지가 우리 집 근처라 '휴식'처리를 하고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주어진 휴식시간은 1시간.

한 번에 다 사용하든 두 번에 나누어 사용하든 상관없다. 세 번은 안된다.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을 낮잠에 몰빵 하기로 했다.

알람을 맞춰놓고 누웠다.

평일 훤한 한낮, 내방에 자리를 깔고 낮잠을 청하는 것은, 단조로운 일상에 살짝이지만 신선한 리듬의 변화를 맛보게 해준다.

30분이 채 안되지만, 짧지만 상큼한..


매번 상큼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마악 잠에 들려는 순간 알람이 울려버렸다. 


서둘러 집을 나서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다시 인증을 하고...

'근데 오늘은 콜이 없나 보네...'

차를 몰아 근처의 차고지로 향했다.

한낮의 차고지엔 아무도 없어야 했는데 선배 한분이 계셨다.

'반차'를 사용하고 들어가신단다.

"오늘은 한가한가 봐요. 콜이 없네요..."

선배도 퇴근하고, 빈 사무실에 선풍기를 켜고 책을 보기로 했다.

책을 보다가 문득, 가끔 배차가 됐음에도 무전기에 알람이 울리지 않는 경우가 떠올라 혹시나 하고 차량으로 가보았다.

다행히도 배차는 되지 않았는데... 악~!!!  '휴식' 상태를 '운행'으로 돌려놓지 않은 게 아닌가!!!

그러니 당연히 배차가 되지 않았고 나는 15분여를 일도 않고 농땡이를 피운 꼴이 되어버렸다.

이럴 수가.. 오늘 정말 여러 가지로 근무평점 깎아먹는구나.

이런 경우도 처음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콜 수행 시작.

상계동에 무사히 하차를 하고 콜을 기다렸다.

보통은 하차 보고(계산)가 끝나면 바로 배차가 되었는데 잠깐이나마 한가했다.

무심결에 하는 운전이지만 집중을 하고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다 보니 알게 모르게 피로가 누적된다.

그러니까.. 결코 '핸들'만 돌리면 되는 게 아니다.


10분여의 휴식 후 배차가 되었다.

XX학교에서 휘경동 재활원으로.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승차시키려는 순간.


"저... 혹시 OO 교회 다니지 않으셨어요..?"

"..?...  네.. 예전에..."


그러고 보니 아이 엄마의 얼굴이 익어 보인다.

'안면인식 장애'처럼 거창하게는 아니어도 사실 얼굴을 잘 골라내지 못하는 편이었다.

사무실에서 매번 부딪치는 동료라도, 사무실 밖에서 만난다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

(결국 이게..  안면인식 장앤가?)


초점이 맞춰지듯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면서 예전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아~!"


이름까지 기억할 수 없었지만 얼굴이 점점 기억으로부터 자리를 잡아오기 시작했다.

키가 크고 서글서글하게 예쁘고 성격이 둥글둥글했던 아이.

반가웠다.


아이를 태우고 목적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출발.


"전에도 오빠 몇 번 봤어요."

"그래? 그럼 내 차도 탔었고?"

"네, 몇 번 탔어요."

"그런데도 내가 몰라봤구나.. 내가 밖에 나오면 사람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해서.."


반가운 한편으로 20년여의 세월이 가져다준 나의 외모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예전보다 머리가 많이 빠졌다.

어쩌면 그래서 내차를 탔었으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또 타게 되고, 운전자 이름도 확인도 해보다가 비로소 오늘 말을 꺼낸 것.


"근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저 OO이요, 최OO."

"아~ OO! 맞다, OO.."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청년부에 같이 있었지만 반이 달랐고, 남자 친구도 있었다.

지금 신랑은 다른 사람이란다.

나는 아니지만 아직 그 교회를 나간다고 했다. 


그 아이의 외모는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살이 아주 약간, 아주아주 야~악간 찐 정도.

"야,  넌 고대로다."

"아니에요, 많이 변했어요..."

"그래 살이 조금, 아주아주 조금 찐 것 같기는 해."

"조금 아닌데..."


하계동에서 휘경동까지는 대략 20분 정도의 거리.

가는 동안 틈틈이 뒷자리의 아들을 챙긴다.

아이의 진학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단다.

내년이면 학교에 입학하는데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내고 싶은 것.


이 일을 하면서 점점 느끼는 건, '모든 사람들이 모두 비슷하다'라고 여기고 싶었던 내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것.

물론 어려운 상황에서도 웃으며 행복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아프지 않은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게다가 가까운 사람이 아프다면, 아니 가까운 사람이 아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수많은 순간들을 겪어야 하기에 나의 기대는 더더욱 바보 같았다, 고 여겨지고 있다.


무난하게,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무심코 던진 한마디.

"그러고 보니 처음이다, 아는 사람 태운 게..."

나름 반가워서 건넨 말이었는데

"그렇죠.. 이렇게 아픈 아이는 흔치 않잖아요.."


아이고....!

아픈 곳에 생채기를 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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