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테라 - 싼티아고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시험기간이면 쏟아지던 잠이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달아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오늘은 특별히 더 걸을 일도 없다.
평소 같으면 느지막이 일어나 침낭 속에서 뭉기적거리며 뜸 들였을 텐데...
까미노가 끝난 피스테라에서의 오늘 아침도 일찍 일어났다.
나란 인간은 '해라 해라' 하면 잘 움직여지지 않고, 놔두면 그나마 작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가 보다.
그동안 '걸어라 걸어라' 하고 재촉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심 걸어야 한다는 은근한 자기 압박이 있었고 이제 그게 없어지니 그냥 자연스레 뜸 들이기가 재미없어진 것 같았다.
반면 사무엘은 곯아떨어졌다.
창밖은 어둑한데 도미토리룸 앞, 어젯밤 뒤풀이가 있었던 그 자리에서 타냐가 버너를 켜고 쪼그려 앉아 아침 준비를 한다.
언제나 한결같은 타냐이다.
나도 옆에 앉아 씨리얼과 우유, 빵으로 아침을 먹었다.
버너를 빌려 차를 끓여 보온병에 담았다.
타냐와 바스크 워먼 에두아르네, 그리고 프랑스 아줌마가 먼저 숙소를 떠났다.
여자들은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모두들 배낭을 챙겨 일찍 알베르게를 나섰다.
나는 사무엘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주섬주섬 짐을 정리해서 배낭을 쌌다.
숙소 창가에 갈매기들이 한가롭게 오간다.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사무엘을 흔들어 깨웠다.
배낭을 두고 등대로 갈까 하다가 그냥 메고 알베르게를 나왔다.
사무엘은 다 떨어져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등산화를 배낭에 넣으며 새 신발을 사겠다고 했다.
아직 내 신발은 멀쩡하다.
사무엘의 2,000km에 비하면 나는 고작 900km 도 걷지 못했으니까.
싼티아고행 버스는 알베르게 바로 앞에서 출발한다.
버스시간을 확인하고 언덕으로 향했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구름 낀 하늘 사이로 햇빛이 보였다.
오늘도 구름, 그래도 어제만큼은 아니다.
바닷가 언덕길을 걸으며 바라본 바다의 풍광이 예쁘다.
아침의 언덕길은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우리네 바닷가의 바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한결 여유롭고 평안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고단하고 지난한 삶의 속살도 볼 수 있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꼭 '바닷가 전원마을'이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나름 괜찮다.
잔잔한 바다 또한 부드러웠다.
조금씩 어제 놓쳤던 일몰(일몰이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에 대한 미련이 되살아났다.
어젯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바다, 그 바다가 사방으로 펼쳐져있다.
언덕 위 바위에서 바라다보는 대서양은 정말 웅장했고 속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함까지 안겨준다.
사무엘이 말했다.
이 바다를 건너 곧장 가면 미국의 66번 도로로 이어져있다고.
바다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루트 66'으로 불린다는 그 도로는 미국 횡단도로이다.
대서양을 건너 66번 도로를 동에서 서로 횡단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면 일본이 나온다.
그리고 독도와 울릉도를 거쳐 동해를 건너가면 '7번 국도'와 만나겠지.
'7번 국도'는 우리나라 동해안을 따라 난 아름다운 길이다.
예전에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던 길이기도 하다.
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서쪽을 향하던 여행이 어느새 다시 집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곳곳에 무언가를 태운 흔적들이 있다.
검게 그을린 바위가 보기에 좋지 않았고, 환경에도 안 좋을 것 같아 사무엘의 신발을 태우지는 않았고
대신 우리는 작은 돌을 주워 바다에 던졌다.
그런데 그때 무슨 바람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시시콜콜한 사소한 기억들은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정작 그 순간의 기억은 아무리 쥐어짜 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무엇을 바라며 던졌는지, 혹은 무엇을 버리거나 잊기 위해 던졌는지..
후자였다면 대성공이지만 전자였다면 정말.. 돌머리.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재미로 던졌던가. Just fun.
절벽 근처의 바위에서 대서양을 감상하며 피스테라에서의 여유를 누리는데 관광버스가 도착하더니 사람들을 쏟아냈다.
평일이었지만 오늘은 스페인의 국경일.
몇몇 관광객들이 '부엔 까미노-' 라며 인사를 건네는데 왠지 우쭐해졌다.
존경의 눈으로 우릴 바라보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사무엘은 '쳇- 투어리스트!' 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분주함을 피해서 등대를 떠나는데 텐트 정리를 마치고 있는 까를로스가 보였다.
"부에노스 디아스, 깨딸?"
"부엔 부엔"
간밤에 조금 추웠지만 잘 잤단다.
여전히 습관처럼 '부엔부엔' 하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다.
까를로스는 또 오늘을 어떻게 보내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
함께 언덕을 내려왔다.
언덕을 내려와 사무엘이 공공연히 약속한 '입수'를 하기 위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한적한 바닷가, 모래사장을 찾았다.
'저스트 펀 저스트 펀..' 이라며 의미를 축소하려는 사무엘.
바위 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스위스부터 줄곧 반바지 한벌로 이곳 피스테라까지 걸어온 사무엘의 허벅지에 반바지의 바랜 청색이 마치 멍자국처럼 물들어 있다.
꽤 차가웠음에도 사무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서리 한번 안치고 물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완전히 입수!
잠시 물속을 걷더니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개헤엄이다.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가보았는데 도무지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서양은 너무 차가워.
나는 발만 담그는 것으로 만족을 했다.
까를로스는 발도 담그지 않는다.
'저게 무슨 짓이야..'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바다에 대한 별다른 감회나 느낌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까를로스의 나라 포르투갈은 대서양의 품에 안겨 있다.
아니, 이곳의 대서양이 갖는 의미가 그곳과는 다르겠지만 그보다는 코앞의 생계가 막막한 것이다.
까를로스에게 입수는 사치이다.
해변 모래사장에는 조가비가 많이 있었다.
그중 예쁜 놈으로 하나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보라색 새끼 조가비.
물밖로 나온 뒤에야 '프리오..' 하며 조금 떨던 사무엘. 귀엽다.
떨면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만족감이 사무엘의 얼굴에 번진다.
입수를 무사히 마친 사무엘이 기분이 좋았는지 점심을 쏘겠다고 했다.
"유 아 마이 게스트!"
바닷가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까를로스는 계속해서 '노 디네로..(돈 없는데..)' 란다.
여기 '유 아 마이 게스트'를 못 알아듣는 사람 하나 더 추가.
"괜찮아 '유 아 마이 게스트'는 '내가 쏜다'라는 거야"라고 아는 척을 해본다.
(자기도 부르고스에서 뤼노 덕분에 알았으면서)
그제야 안심하는 까를로스.
우리는 '보까디오 꼰 뿔포'를 시켰다.
나는 거의 습관적으로 까페 꼰 레체를 시켰는데, 까를로스가 '뿔포에 커피..? 세르베싸(맥주)!' 한다.
사무엘도 맥주.
부드러운 문어가 잔뜩 들어간 보까디오가 고소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문어랑 커피보다는 맥주가 더 자연스럽다.
문어의 조금 물컹함과 고소함이 까페 꼰 레체의 부드러움과 달콤함에 잘 어울릴 리가 없다.
마치 치킨에 밀크커피 같다.
톡 쏘는 맥주나 콜라가 제격이다.
맥주가 시원해 보였지만 '저스트 리틀(한 모금만)..'이라고 하지는 못했다.
보까디요 먼저 다 먹고 까페 꼰 레체를 디저트로 먹었다.
어쨌든 사무엘 덕분에 까를로스도 한 끼를 해결했다.
어제처럼 경계하지 않는 사무엘이다.
싼티아고행 버스 출발시각까지는 여유가 많았기에 우리는 식당을 나와 부둣가를 거닐었다.
고기잡이 배가 들어와 잡은 고기를 내려놓고, 어부들이 옷을 갈아입고, 작은 배로 갈아타고, 집으로 향한다.
갈매기가 모여들고..
따뜻한 햇살 아래 잠시 부두 바닥에 누워 하늘도 보고 여유를 누렸다.
오늘은 걷지 않아도 되니까.
싼티아고행버스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결국 나는 일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저녁 버스를 타기로 하고 사무엘만 떠나기로 했다.
사무엘이 모자에 달고 다니던 스위스뱃지와 포르투 갈길을 잘 걸으라며 자기 배낭에 달려있던 포르투갈뱃지를 떼어 건네주었다.
나도 뭔가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배낭을 뒤져 우리 동전 100원짜리 하나를 꺼내 주었다.
"행운의 동전은 아니고.. 그냥 동전이야. Just coin.."
빰쁠로냐에서 제이미에게 목걸이를 주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무엘 것이 되었을 텐데..
너무 일찍 목걸이를, 그렇게 가까워지기도 전에 제이미에게 주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덕분에 제이미랑 가까워졌으니 그걸로 만족.
사무엘은 스위스에 오게 되면 자신의 알베르게에 꼭 들르란다.
서로 안아주고 이별을 고했다.
까미노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사무엘.
아이패드를 도둑맞아 모든 기록을 잃어버렸지만 내게 시작과 끝의 기록이 있으니 사진은 정리해서 꼭 보내줄게.
"살루트-!"
사무엘을 떠나보내고 나는 다시 등대로 향했다.
벌써 세 번째 오르는 언덕이다.
까를로스는 '그깟 일몰이 뭐 대수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언덕에 다시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일몰 또한 사치이다.
저녁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혼자 언덕을 올랐다.
오늘은 걷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많이 걷는다. 그것도 오르막 언덕길을.
해가 저물어가자 관광객들은 하나둘 차를 타고 떠나고 일몰을 기다리는 몇몇 사람들만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서쪽하늘을 바라본다.
나도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바로 까를로스가 텐트를 쳤던 자리.
등대 앞 작은 동산의 아늑한 자리다.
해가 떨어지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구름이 잔뜩 끼었다가도 희미하게 노란 하늘이 나타났다가는 다시 구름이 가려버리고..
버스 시간은 다가오는데 해가 떨어진 건지 아직 덜 떨어진 것인지 영 애매했다.
내가 일몰을 본 건지 못 본 건지도 헷갈렸다.
저 멀리 수평선 근처에 구름이 끼었다 비켰다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몰은 볼 수 없었다.
멀리 수평선 가까이 작은 요트 한 척이 조금씩 움직였다.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 마시며 노을을 상상했다.
왠지 대서양 일몰에게 버림받은 기분.
아쉬움을 뒤로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언덕을 내려왔다.
까를로스는 약속 장소인 버스정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 동행을 하고 있는지 애초에 나와는 만날 마음이 없었는지..
하긴 나타났다고 하더라고 기껏 밥이나 한 끼 사줬으려나..
까를로스에 대한 나의 인색한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기도 했지만 그런 씁쓸함보다는 홀가분함이 더 컸다.
어색한 이별을 나누기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훨씬 낫다.
'까를로스가 여행을 잘 마칠 수 있을까.. 잘 마치겠지, 여태껏 잘 왔잖아..'
고양이 쥐 생각해주듯 의무적인 염려로 씁쓸함을 달래 본다.
대서양 일몰과 까를로스에게 연이어 바람맞고 싼티아고행 버스에 올랐다.
요금은 직접 기사에게, 배낭은 화물칸에 넣어야 한다. 귀중품만 챙겨 벨트 색에 담았다.
날은 금방 어두워져 해안길의 풍광은 볼 수 없었다.
한 달여를 걷기만 하다가 오래간만에 탄(경찰차 잠깐 빼고) 자동차가 영 불편했다. 멀미도 난다.
졸다가 깨다가 멀미하다가를 반복하며 어두운 해안길과 작은 마을과 도시를 돌고 돌아 버스는 10가 되어서야
싼티아고터미널에 도착했다.
인적이 뜸한 밤의 터미널은 조금 무서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우선 생각한 것이 몬테 도 고조였다.
문을 닫으려는 안내소에 가서 '몬테 도 고조'행 버스 타는 곳을 물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저녁도 먹지 못한 데다가 멀미까지 한 뒤라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숙소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터미널을 나와 헤매다가 다시 길가는 사람 중 한 청년에게 물었다.
"돈데 에스따.. 버스.. 몬테 도 고조..?"
다행히 내 말을 알아들었는데 버스 타는 곳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지나가던 다른 사람을 붙잡고 대신 물어봐주었다.
이런 친절함이라니, 피로가 조금 가셨다.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친절히 안내해주고 자신이 모르면 다른 사람에게 대신 물어봐준다.
다행히도 그 사람이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처음의 그 청년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같이 동행해주었다.
안내해준 곳은 바로 싼티아고 터미널 앞이었다. 다시 원위치.
그들은 버스 번호와 타는 곳까지 친절히 알려주고 담배를 나눠 말아 피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참 떠들기를 - 얘기하기를 -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
외국인의 길안내를 돕기 위해 처음 만난 이들끼리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몇 번이나 '무차스 그라시아스'를 반복하고 버스를 기다렸다.
낯선 도시의 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렇게 몬테 도 고조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먼발치서 낯익은 리듬의 걸음걸이로 터미널을 향해 다가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사무엘.
'이게 멀미 후유증인가?'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알레그리아 델 디아!
이게 뭔 일인가 했더니 사무엘은 그만 버스에 지갑을 두고 내렸는데 그것을 찾으러 터미널에 왔고
다행히도 지갑을 발견한 버스기사와 연락이 되어 찾을 수 있었단다.
아이패드와 목걸이, 게다가 현금까지 도둑맞았는데 지갑마저 잃어버렸다면 정말 '까미노'는 사무엘에게 악몽으로 남았을 테지만.. 나는 '사무엘이 지갑을 흘렸던 것'에 대해 감사했다.
함께 지갑을 찾고 사무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끝내주는 알베르게'로 향했다.
부엌 시설이 잘돼 있었고 와이파이가 빵빵하게 터지며 쿨한 주인이 있다는 알베르게.
24시간 문을 여는 수퍼마켓이 바로 앞에 있고 대성당이 코앞이라는 알베르게.
다만 숙박비가 하루 15유로라는 알베르게.
싼티아고 터미널은 대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숙소도 가까이 있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그곳은 알베르게가 아닌 호스텔이었다.
배낭여행자들과 순례자 행색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도미토리룸의 한쪽 침대를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긴장이 풀리니 허기가 몰려왔다.
마침 오는 길에 문을 연 케밥집을 봐 두었기에 짐을 풀자마자 달려갔다.
얇게 썬 닭고기와 빵, 감자튀김과 시원한 콜라가 정말 맛있다.
'까페 꼰 레체 꼰 보까디오 꼰 뿔포'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감자튀김 먹고 싶어..
케밥으로 회포를 풀고 숙소로 돌아왔다. 사무엘은 여전히 좁은 주방에서 사람들과 포도주 파티 중이다.
배낭여행자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같은 방의 다른 여행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불 꺼진 방안을 더듬더듬 더듬어 자리를 정리하는데 한 사람이 괜찮다며 불을 켜준다.
케밥보다 밝고 따뜻한 배려.
늦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많이 걸었던 그 어떤 날보다 버스를 탔던 이날이 정말 피곤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