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다리

모스 - 발렌샤

by 외투



엘클라시오때문에 12가 넘어 잠자리에 들어서 그랬는지 아침에 8시 반이 넘어서야 일어났다.

난방을 빵빵하게 해놔서 신발도, 빨래도 잘 말랐다.


베르나, 줄리어스와 인사를 나누고 길을 나서는데, 이날따라 유난히 발바닥이 아팠다.

벌써 물집은 굳은살이 된 지가 오래인데 이제는 발바닥이 아프다.

미친 배낭 때문에 어깨도 아팠다.

하도 배낭 어깨끈을 들었다 놓았다 해서 장갑 엄지손가락에도 구멍이 났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의 첫걸음은 힘들었다.

하지만 걷다 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다. 시작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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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는 작지만 부유한 느낌의 마을이었다.

안개가 낀, 산타할아버지를 벽에 매달아놓고 고생시키는 모스를 벗어났다.

오늘도 모스의 기념물을 보면서 모스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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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로를 따라 걷다가 좁은 골목을 걷기를 반복하다가 육교로 철길을 넘어가면서 풍경이 바뀌었다.

산업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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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옆,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납작 엎드린 모양새가 시무룩해 보였다.

낯선 이 가 지니 가는데도 요지부동이다. 만사가 귀찮은 듯.

아무리 사무엘이 투우사처럼 두 손을 들어 도발했데도 눈도 깜빡 안 했을 것만 같은 무심한 표정.

서서히 공장지대가 나타난다.

넓은 광장이 자동차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뭐.. 공장지대도 스페인스럽다. 조용하고 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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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은 일요일이지.

요일 개념이 없다.

어제 부식을 조금밖에 준비해놓지 않았는데.. 문을 연 가게나 바르가 있으려나.

자동차 광장을 지나가는데 반대편에서 말을 탄 사람이 다가온다. 말을 타고 까미노를 걷는 것인가?

조가비는 달고 있지 않았지만 싼티아고를 향해 가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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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말 발자국을 남기며 멀어져 갔다.

말을 타고 까미노를 걷는다면 하루에 얼마나 갈 수 있을는지.. 내 걸음보다는 빠르겠지.

그건 그렇고 잠은 어디서 자는지가 궁금하다. 말먹이는 어떻게 해결하는지도 궁금하다.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먼 길 끝에 빨간 판초를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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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스페인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그는 조금은 들뜬 표정과 발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올라, 부엔 까미노-'

밝은 빨강의 판초와 들뜬 표정, 그리고 겅중겅중 걷는 발걸음이 마치 피에로 같았다.

나도 포르투갈에 들어서면 저렇게 들떠 걸으려나..

산업지대 외곽에 있는 바르에 들어갔다.

일요일이었지만 문도 열렸고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꼭 공장 노동자 같은 인상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바르의 아가씨도 터프했다.

보까디오와 까페 꼰 레체로 점심도 먹고 휴식도 취했다.

날이 조금 추워 화장실에서 바지를 갈아입었다.

산업지대를 지나 도시를 벗어나면서 다시 숲길로 들어섰다.

숲 속의 오래된 돌다리는 자동차가 지나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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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돌아 작은 마을로, 다시 마을에서 숲길로 이어지는 길이 예쁘고 공기도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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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에 걸려있는 빨래.

비가 오락가락하는데도 그냥 내버려둔다.

하긴 깨끗한 비는 더 이상 빨래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건물들을 보면 관리를 잘 한탄도 있겠지만 공해가 없어서 그런지 대체로 깨끗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면 얼마나 상쾌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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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끼 낀 돌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이 맑다.

스페인의 외곽으로 갈수록 점점 풍경도 소박해져 갔다.


국경마을 뚜이에 도착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일요일임에도 불구라고 해야 할지.. 도시는 어둡고 황량하며 축축한 인상이었다.

오래된 성당과 골목길은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하지만 도시의 색깔은 우중충하다.

말 그대로 국경의 '변두리'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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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이 성당도 몇몇 관광객만이 기웃거릴 뿐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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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라도 화창했다면 모를까 이런 날씨는 짙푸른 숲 속에서나 운치가 있다.

뚜이에서 머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우울한 느낌의 뚜이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고 일정상으로도 그렇고 해서 포르투갈로 넘어가 오늘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간이 관광안내소가 열려있어 안내지도를 받아 들고 화살표를 되짚어 포르투갈로 향했다.

성당을 지나 아기자기한 골목을 돌아 나오니 비로소 강이 보였고.....

그 건너로 포르투갈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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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안개가 살짝 드리워진 포르투갈의 풍경이 몽환적이다.

스페인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다시 남쪽으로 걸어 포르투갈 국경까지 왔다는 게 내심 뿌듯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갈 때 은근슬쩍 국경 넘기를 도둑맞아 나도 모르게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순간 이동한 게 너무 아쉬웠는데, 여기서는 그럴 일이 없다.

미뇨강으로 국경이 뚜렷하게 구분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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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뇨강너머, 저 다리를 건너면 포르투갈이다.

저 다리는 어떻게 건너는지, 또 건너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궁금했다.

자, 이제 스페인을 떠나 포르투갈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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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는 검문소도, 통행료를 내거나 받는 매표소도, 사람도 없었다.

그냥 한강철교를 건너가는 그런 분위기다.

다리 가운데로는 차량이 지나가고 가장자리로 인도가 분리되어있는데,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

이렇게 싱거울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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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의 중간지점을 알리는 표지.

좌 에스빠냐, 우 포르투갈.

나의 왼발은 스페인에, 오른발은 포르투갈에.. 그야말로 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양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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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에서 바라본 스페인

아디오스 에스빠냐..

한국을 떠날 때 와도 다르고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올 때 와도 달랐다.

한국을 떠나 올 때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기에 정신없었고 프랑스는 기껏해야 '중간 기착지'였으며 피레네를 넘을 때는 언제 국경을 넘었는지도 모르게 넘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까미노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헤어질 때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많은 인연을 만들어주고 상처도 주고 기쁨과 휴식도 주었던 스페인이었기에 더 그랬다.

그야말로 정든 땅과 헤어진다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정든 스페인을 떠나는 게 아쉽고 포르투갈이 기대가 되는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점점 멀어져 가는 스페인을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뒤로 걸어서 그랬나.... 시간도 거꾸로 흐른다.

스페인에서 이 다리를 건너 포르투갈로 가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데 두나라간에는 1시간이라는 시차가 있다.

그렇기에 만약 4시에 스페인을 출발한다면 포르투갈에는 대략 3시 10분쯤 도착하게 된다.

1시간을 버는 셈.

혹시 시차 적응(?)이 걱정된다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서 1시간 동안 다리를 건너가면 되겠다.

타임머신이 뭐 별건가.. 여기 타임브릿지가 있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포르투갈을 향해가는 이 방향이 순방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으로는 시간에 맞춰 걸을 수 있지만, 반대로 싼티아고를 향해 걷는 사람들은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아무리 걸음을 빨리 걷는다고 해도, 아니 차를 타고 간다고 해도 시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

4시에 출발해서 절대로 4시 10분에 스페인에 도착할 수가 없다.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5시 5분 정도 되려나.

1시간을 도둑맞는 것.

그동안 거꾸로 걷고 있다는 생각이 뒤집어진다.

내가 가는 방향이 정방향이야.

아스토르가 가는 날 보았던 글귀 'GOOD SPEED IS YOUR SPEED' 가 생각난다.

'네 속도가 좋아' 누가 뭐래도,

'네 방향이 옳은 방향이야'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아니, 당장은 약간의 해를 끼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내가 옳았음을 증명함으로써 사과를 대신하면 된다.

포르투갈에 들어왔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사람도, 검문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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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안내소 같은 건물만 덩그러니 서있고 스페인을 향한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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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큰 도로를 따라가면 바로 발렌샤의 시내로 들어가지만, 자연스레 우측의 성벽이 발길을 잡아끌었다.
조금 힘들어도 '저긴 가봐야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는 성문의 구조도 특이하고 옛 성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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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으로 둘러싸인 독특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미뇨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의 옛 발렌샤는 전체가 성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요새다.


IMG_1612.jpg?type=w740 발렌샤의 요새에서 바라본, 시간의 다리 건너편으로 스페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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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곳곳에는 대포가 있었는데 스페인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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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주변에 말발굽 자국이 있다.

스페인의 산업지대에서 보았던 그의 흔적인가 보다.


성곽 안쪽으로는 상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념품 가게도 있고 카페와 옷가게 등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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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과 표정이 하나로 잘 어우러져 있다.

자연스러운 색깔의 조화 속에서 전혀 'UNITED' 하지 못한 베네통만 통통 튀고 있네.

일요일 저녁의 발렌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포르투갈과 인접한 스페인의 한산한 뚜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페인과 인접한 포르투갈의 발렌샤는 활기가 넘쳤다.

아마도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곳 발렌샤에서 주말을 즐기고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는듯했다.

그런데 위의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다가.. 그만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떨어지는 소리가 어째 예사롭지 않게 경쾌(?)했다.

'퍽-' 소리를 냈다. '툭' 이 아닌 '퍽!'

불길한 느낌으로 집어 들었는데 역시나 액정이 깨져버렸다.

돌조각을 박아 넣어 만든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보호케이스도 소용없었다.


IMG_1617.jpg?type=w740 포루투갈입국기념 스템프!


버튼을 눌러보니 그래도 작동에는 이상이 없다.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찜찜하다.

'이거 불길한 징조 아니야.. 아냐 내가 좀 들떠서 덤벙거린 거야..'

국경 넘기가 너무 싱겁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아서일까, 아주 비싼 입국 도장을 찍고 말았다.


발렌샤요새에는 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차 한 대가 겨우 드나들 정도의 크기였다.

신호등을 이용해서 차량 통행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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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불에 지나가고, 빨간불이 들어오면 반대편에서 차들이 나온다.

요새를 빠져나와 알베르게를 찾았다. 요새와 가까이에 있어 찾기 어렵지는 않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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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서의 첫 알베르게

빨리 쉬고 싶은 마음에 신호등도 무시하고 건너간 알베르게의 문은 닫혀있었다.

분명 창문으로 들여다본 실내에는 불이 켜져 있는데 인기척은 없고..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문에 붙어있는 안내판에도 지금은 열려있어야 할 시간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요일이라 그런가? 잠시 기다려볼까?

하다가 연락처가 적혀 있어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핸드폰으로? 아니다.

요새 옆 알베르게에서 국제전화요금 대포에 맞아 전사하기 싫어 공중전화를 찾았다.

해외에서 처음 해보는 공중전화 통화시도.

길 건너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50센트였던가,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었더니 다행히도 신호가 간다.

알베르게 문에 적혀있던 번호를 누르고... 연결음이 들리더니 곧 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헬로우.. 아임 어 필그림.. 알베르게.. 클로우즈드. 홴 더 알베르게즈 오픈?" 정신없이 떠오르는 대로, 아니 생각해둔 대로 정신없이 떠들었는데 다행히 상대가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녀가 말하길 순례자가 있다는 것이다.

순례자에게 열쇠를 주고 자기는 퇴근했다는 것(이라고 대강 내 맘대로 해석했다).

전화를 끊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전화통화 성공에 살짝 우쭐해졌다.

'나 포르투갈에서 공중전화통화에 성공한 사람이야'

한편으로는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다른 숙소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이었지만,

열쇠를 쥐고 있는 놈이 언제 들어올지 알고 무한정 기다린다는 말이냐.

그가 포르투갈 입국 기념으로, 아니면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날을 기념해서 파티라도 한다면 많이 늦어질 텐데 배는 고프고 배낭은 무거워 더 이상 들고 돌아다닐 힘도 없는데..

하는 수 없이 문 앞에 퍼질러 앉아 남은 비스킷을 씹고 뜯고 맛보며 기다리기로 했다.

언젠가는 열릴 문이지만 언제 열릴지 모르는 문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배낭을 문 앞에 놓고 알베르게 뒤편에 있는 소방서로 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당장 소방관 아저씨는 알베르게 관리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더니 곧 관리인이 올 테니 가보라고 한다.

감사인사를 하고 알베르게로 가니 정말 관리인이 곧 차를 몰고 도착한다.

여자 관리인은 그리 싫은 내색이나 미안한 내색 없이 그냥 알베르게를 안내해주고 스탬프를 찍어주고 갔다.

일요일의 휴식을 방해한 것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온 걸 보면서 포르투갈 소방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2층 숙소로 가보니 침대 하나에 짐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망할 놈의...'

구석자리의 침대를 선택해서 짐을 풀고 우선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알베르게에는 주방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지만 포르투갈 입국 기념으로 사 먹고 싶었다.

이곳의 문은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방식이어서 열쇠가 없는 나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나와 문을 닫았다.

식사 후에도 그놈이 안 왔을 경우 창문을 통해 월담할 생각이었다.


2011-12-11_21.15.jpg?type=w740 거북이 두마리처럼 생긴 발렌샤의 성곽, 왼쪽 하단 삼각형 부분이 주 출입구


나는 다시 소방서로 가서 식당을 추천받고, 또 스탬프도 받았다.

참 소방관 아저씨를 귀찮게 한다. 아까 한꺼번에 해결할 것을.

추천해준 식당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저렴한 관광식당 중의 하나인 '크리스티나'.

식당 이름 참 예쁘네.

밖에서 기웃거리니 전혀 '크리스티나'스럽지 않게 생긴 배 나온 주인아저씨가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오늘의 메뉴가 6유로.

정말 싼걸.

종업원이 "포도주도 줄까?" 묻길래

"그래, 비노 블랑꼬."

생선 스테이크를 시켰기에..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백포도주를 곁들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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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홀에 손님은 나 혼자.

그냥 철 지난 관광지의 그저 그런 식당 같았는데, 한쪽에서는 종업원이 천장의 조명을 닦고 있었고 주인장의 탁자에는 재떨이가 놓여있다. 벽에는 싸구려 이발소 그림이 걸려있다.

커다란 생선의 몸통 한 조각과 당근, 감자와 채소들.. 소금을 얼마나 쳐댔는지 스테이크가 짰다.

맛은 그럭저럭.. 모르겠다.

그런데 계산을 하는데 12.2유로란다.

"6유로라며.." 했더니 포도주병을 가리킨다. 그것도 반도 안 마셨는데.

12유로가 아주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스페인에서는 포도주가 식사에 무료로 딸려 나왔었는데 이곳은 아닌가 보네.

눈탱이 맞은 기분으로 씁쓸하게 예쁜 크리스티나가 없는 '크리스티나'를 나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괜히 해 먹던 놈이 사 먹으려니 영.. 체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포르투갈에 들어오자마자 휴대폰의 액정을 깨 먹고, 알베르게의 열쇠를 가진 녀석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청승맞게 쭈그려 앉아 비스킷으로 허기를 채우더니, 저녁식사까지 눈탱이를 맞았다.

내심 기대를 잔뜩 하고 입국한 '약속의 땅' 포르투갈인데 나를 반기기는커녕,

오히려 골탕 3종 세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2층에 불이 켜져 있다.

'그놈이 왔구나'

어디 이놈의 망할 순례자 얼굴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온화한 미소의 이탈리아노였다.

이름부터 섬세하고 부드러운 '발레리오'.

발레리오는 리스보아부터 까미노를 시작했다는데 나를 무척이나 반겨주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은근 아줌마스런 수다를 부드럽게 늘어놓았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여성스러웠다.

내가 포르투 갈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니 차근차근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포루투부터 리스보아까지는 길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길 또한 고속도로를 건너는 등 위험하고 찻길을 따라 많이 걸어 공기도 나쁘단다.

그 구간은 알베르게가 없으니 숙소도 소방서나 호스텔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내 일정을 알려주었더니, 일단 포루투까지만 걷고 꼬임브라에 들렸다가 파티마에서 마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라며 금세 코스를 짜준다.

포루투부터 꼬임브라, 파티마는 버스를 이용하라고 했다.

친절한 설명에 내내 품고 있던 적의(?)는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

포루투 갈길에서 사람이 적어 외로웠는지 원래 말하길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외로운 데다 말하기까지 좋아해서였는지..

그래도 부드럽게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게 듣기 싫지 않았다.


자기는 필요 없으니 가지라며 포르투갈의 알베르게 정보가 적힌 종이도 주었다.

알베르게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포루투엔 알베르게가 없고 소방서에서도 재워주지 않으니 호스텔을 이용해야 한단다.

여러 알베르게 중에서도 '폰테 데 리마'의 알베르게는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럼 내일은 폰테 데 리마까지 가야겠다고 하니 이쪽에서 걸으면 오전에는 산을 넘을 것이며 도착하기 전에 숲을 지나야 하니 어둡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그리고 파티마에서 공짜로 잘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자기가 찍은 파티마 사진을 보여주며 저 교회 뒤로 돌아가면 순례자 여권을 소지한 사람에 한해서 무료로 잘 수 있는 '살라빠루끼알' 이라는 교회 숙소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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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빠루끼알? 깐따삐야 도 아니고.. 뭐지..'

무슨 주문 같은 낯선 단어를 불안하게 중얼거리니까, 그냥 '교회에 딸린 방' 쯤으로 생각하면 된단다.

공짜 숙소라는 말에 귀가 쫑긋 했다.

위치에 대해서 한번 더 확인을 받았다.


이곳 발렌샤의 알베르게는 따뜻한 물은 나오지만 난방은 되지 않았다.

'프리오~'하며 침대로 향하는 발레리오에게 "잘 자" 인사를 하고 늦은 샤워를 했다.

발레리오는 계속해서 점점 추워질 것이다. 나는 따뜻한 남쪽으로 갈 것이고.

오늘은 알베르게에 발레리오와 나, 이렇게 둘이다.

무작정 포르투갈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발레리오 덕분에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만약 이날 알베르게에 혼자였다면 무척이나 쓸쓸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혼자였다면 방과 복도의 불을 켜놓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내게 골탕 3종 세트를 먹였지만 '발레리오'라는 선물도 준비해두었다.

병 주고 약 준다.

무사히 포르투갈까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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