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내 딴에는 늑장을 부린다고 뜸 들이다가 느지막이 일어난 것이지만 이곳은 알베르게가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까미노를 걸을 필요가 없는 배낭여행자들은 아직도 꿈나라다.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켜보니 부재중 전화가 몇 통 들어와 있었다.
'웬 국제전화..?'
확인해보니 보증을 서줬던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문자도 한통 들어와 있다.
'보증 갱신일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언제 한국에 오는 거야?'
그렇지, 내가 여행 온 이유 중 하나는 친구의 보증을 피하기 위함이었지.
차마 전화는 하지 못하고(전화비 때문이 아니라..) 거금 300원짜리 국제문자를 보냈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겠어. 미안해서 어쩌지?'
사실 귀국 날짜는 보증 갱신만료일인 12월 23일이었다.
23일은 금요일이었고 그날만 넘기면 보증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생각에 친구에게는 거짓말로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고 문자를 보낸 것이었고 그러면 다른 보증인을 구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 할 수 없지. 어떻게든 되겠지. 몸 건강하게 여행 잘해라.'
라고 친구로부터 바로 답문이 도착한다.
보증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여행 잘하라는 친구의 문자메시지..
기분이 좀 그랬다.
내가 힘들 때 많이 도와줬던 친구였는데..
'미안하다 친구야. 하지만 이 방법이 그나마 너와 나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야.'라고 자위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내가 보증이 필요해서 한 친구에게 보증을 부탁했었는데 '보증..'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그 친구는 "안돼!"라며 못을 박았었다.
당시에는 섭섭하고 배신감마저 느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게 현명한 처사였다.
그 친구가 보증을 서주지 않았었기에 지금도 그 녀석과는 허물없이 잘 지내고 있다.
이번에도 그러기를 바라면서 친구의 보증을 피하기로 했던 것.
한국에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이 갱신해주었을 것이다.
보증을 피하기 위해 일정을 늘린 덕분으로 여기 포르투까지 걸을 수 있었다.
1층 주방으로 내려가니 식탁에 빵과 갖가지 잼, 씨리얼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 주스와 우유, 커피가 마련되어 있고 관리인 엘리아가 빵을 데우고 있었다.
따뜻한 빵에 잼과 버터를 발라 먹고 커피도 마시고 씨리얼도 먹고..
엘리아에게는 오후에 다시 체크인을 하겠다고 알려주고 가벼운 차림으로 누런 집을 나왔다.
천천히 거리를 구경하면서 내일 차편을 알아보기 위해 기차역과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도시가 예쁘다.
오래된 건물들과 골목이 고풍스러우며 무질서한 듯 자유로운 분위기다.
누런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면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있다.
꼬임브라행 기차 편을 알아보고 버스편도 알아보았다.
버스가 더 저렴하고 편리할 것 같아 버스로 결정했다.
차편도 확인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포르투를 구경해 볼까나..
터미널에서 나와 도시를 거닐었다.
건물 사이로 뻥 뚫린 공간이 나오고 다리가 보였다.
다가가자..
어제 도착했을 때는 어두워서 몰랐는데 사람들이 괜히 포르투, 포르투 하는 게 아니었다.
프랑스의 바욘으로 유럽 도시의 첫 경험을 했을 때처럼, 포르토는 어느덧 익숙해져 그 나물에 그 밥 같았던 유럽 도시의 매력을 다시 일깨우기에 충분한 도시였다.
거대한 협곡 같은 강변을 따라 집들이 예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멋진 배들이 강 위에 떠있고 그 위를 갈매기가 날아간다. 어쩌면 그렇게 색이 예쁜지.. 정말 매력적이다.
한눈에 반해버렸다.
강을 따라 경사가 가파른 지대에 따뜻하고 산뜻한 색들의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타일 조각처럼 박혀있었다.
다리는 복층으로 되어있었는데 아래로는 자동차가 다니고 위로는 전철이 다녔다.
에펠탑과 관련된 다리라더니 과연 철골구조물이 웅장했다.
정작 파리까지 가서 에펠탑도 보지 못했지만.
색다른 풍광에 눈이 호강한다.
도시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화려 하다기보다는 소박하면서 정겹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으며 지루하지 않았다.
생장이 작고 예쁘면서도 조금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면, 포르토는 거대하고 신선하면서도 친근한 게 서민적이다.
다리를 위아래로 건너 다니며 구경했다.
윗동네(?)에서 아랫동네(?)로 내려오는 골목은, 부암동 골목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뭐 포르투에 별다른 추억이 있을까마는 그냥 거리에서, 골목에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간간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냥 돌아다녔다.
오늘도 주구장창 걷는구나.
골목골목을, 배낭 없이 발걸음도 가볍게 느긋하게 마실을 다니는데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침 점심때라 배도 고프고 해서 골목 안에 있던 작은 식당으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한참을 걸었기에 번화가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는데 소박한 식당이었다.
오늘의 메뉴 중에서 생선요리를 시켰다.
생선조림 같은 요리가 나왔는데 맛이 괜찮다. 값도 저렴하고.
한번 데인 게 있어서 포도주는 사양했다. 밥값보다 더 나올까 봐.
그런데 옆 테이블을 보니 이곳은 포도주를 무료로 제공해 주는 것 같았다.
투명한 유리병에 포도주가 담겨 나오는데 옆 테이블의 남자가 마시고 싶은 만큼 따라 마시고 있었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는 진한 에스프레소.
밀크 커피일 줄 알았는데.. 으~ 써! 그래도 비 오는 날이라 괜찮다.
비와 커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평소에는 마시지 않다가도 비가 오면 가끔 커피가 당긴다.
우연히 비를 피해 찾아 들어온 식당이었는데.. 동네 사람들만 아는 숨겨진 맛집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분위기도 편했다.
이방인이라고 조금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세계 각국의 관광객에 익숙한 도시라 그런지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배부르고 기분 좋고.. 비도 그쳐 간다.
식당을 나와 이번에는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중앙광장 쪽으로 걸었다.
서울로 치자면 부암동을 거닐다가 북촌, 안국동을 지나 종로, 명동으로 나온 느낌이다.
적당히 현대적인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주 현대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옛것도 아닌 것이 어정쩡한 건물들.
아까 보았던 강변의 풍경에 비하면 그냥 밋밋한, 그 나물에 그 밥 되겠다.
커다란 로터리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탑이 웅장했다.
무슨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탑인지.. 하여간 꼭대기의 사자상이 인상적이었다.
독수리를 짓밟고 노려보는 사자상.
탑 주변에 최근에 지은 것 같은 독특한 건물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한 여자가 다가오더니 무슨 설문조사 같은 걸 한다.
말도 안 통하는 걸 겨우겨우 응대를 해줬더니 결국에는 기부를 해달라고 한다.
내용도 잘 모르는 취지의 기부는 하기 싫었고.. 해서 싫다고 했더니 나더러 나쁘다고 했다.
뭐야 이 사람이!
나쁘다는 말을 듣고 그냥 물러선다면 기분이 정말 나빠질 것 같았고 또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풍겨서 따졌다.
애초에 돈을 목적으로 접근한 것 아니냐며, '나쁜 것은 당신이다' 고 했더니 이내 사과를 한다.
사과는 받았지만 기분이 나빠 기부는.. 안 했다.
숙소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 걷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서 그냥 걸었더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냥 내 방향감각에 의지해서 또 설렁설렁 걷기 시작했다.
당연히 길을 잃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길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길눈이 밝은 편은 못되나 보다.
옛다리와 새로 지은 다리
다리는 오래될수록 더 운치가 있다.
새로 지은 매끈한 다리보다는 철골구조의 다리가, 철골구조의 다리보다는 돌다리가 더 매력적이다.
강변이 나오자 그제야 방향감각이 돌아왔다.
한참을 걸어 누런 집에 도착해서 하루치 숙박비를 다시 계산하고 침대에 누웠다. 피곤이 몰려와 눈을 붙였다.
잠시 씨에스타.
저녁 무렵이 되어서 눈을 뜨고 다시 나왔다.
엘리아가 포르투의 명소 몇 군데를 추천해주었는데 그중 하나인 서점으로 향했다.
평소에도 서점 구경을 좋아했는데(책을 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서점 구경)
해리포터 작가가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바로 그 서점이다.
누런 집을 나와 시청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된다.
과연 해리포터가 마법을 부릴법한, 크지 않고 아담한 공간의 고풍스러운 서점이다.
바닥에는 작은 기차 레일 비슷한 게 있어서 레일을 따라 수레를 끌고 다닐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상당히 아름답다.
수레를 밀고 달려 그대로 호그와트로 사라져 버리거나 계단에서 볼드모트가 걸어 내려온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졸업식인지 아니면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검은 망토를 입은 청년들의 무리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서점 자체가 오래된 골동품이었다.
새책도 있었지만 서점에 어울릴만한 품위 있는 책들이 가득했다.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 금지.
당연하겠다. 촬영을 허가하면 사진 찍는 사람들로 영업이 마비될걸.
그래도 다들 몰래몰래 사진을 찍었다.
나도 딴청을 부리며 휴대폰으로 찍었는데.. 잘 나왔을 리가 없다.
책 구경, 서점 구경, 구경하는 사람 구경..
결국 밖으로 나와 내부의 모습을 한방 찍었다.
당시에는 입장료 같은 것은 없었는데 지금은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포르투는 야경도 아름다웠다.
적당히 가려주고 따뜻한 조명을 받아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더욱 눈길을 잡아 끈다.
트램도 예쁘다.
대중교통이 아니라 왠지 놀이공원의 '회전목마'퍼럼 놀이기구 같았다.
걷기에도 관성이 있는 것처럼, 여행의 방법에도 관성이라는 게 작용하는가 보다.
계속 걷게 된다.
그래서 트램도 타지 않았다.
관성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아직 까미노의 여운이 많이 남아있었고 아마 파티마까지는 계속 작용할 것이다.
포르투에는 유난히 빵집이 많았다.
작은 분식점 같은 빵집들이 저마다 먹음직스러운 빵들을 진열해 놓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몇 개 사들고 먹으며 걷는데 빵맛도 좋다.
발바닥은 조금 아팠지만 선선한 밤공기를 가르며, 또 맛있는 빵을 씹으며 포르투의 밤거리를 걷는 게 재미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뭔가 하고 다가가 보니
한 건물의 벽면을 이용해서 영상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상영될 쇼를 위한 리허설 같았다.
건물의 창문과 외형을 이용해서 그래픽이 펼쳐지는데 아이디어도, 그림도 멋졌다.
건물이 부서지는 듯한 착각도 들게 만들었다.
길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영상쇼를 구경한다.
영상이 끝나고 나서 가족과 친구를 위한 기념품을 사기 위해 엘리아가 추천해준 기념품 가게로 향했다.
리스보아보다 포르투가 더 저렴하다고 했으므로 오늘, 포르투를 떠나기 전에 사야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점원들이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다.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한국을 '스마트'한 나라라며 가고 싶다고 한다.
친구들이 한국에 있다는데 아주 좋다며, 특히 요즘 이곳 포르투갈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며 한국에서 일하고 싶단다.
돈은 더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노동의 강도가 차원이 다를걸?
그러면서도 잠깐 그들을 부러워했다.
조국을 떠나 유럽에서 직장을 갖고 살아가는 그들을.
'관광객으로 왔을 때와 근로자로 왔을 때의 차이'도 모르면서..
친절하고 붙임성 좋은 점원들 때문에 내손에는 생각보다 많은 기념품이 들려있었다.
덤으로 연필 몇 자루까지 받아서 가게를 나왔다.
누런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제보다 붐볐다.
우리 방에도 손님이 늘었고 1층 로비도 불타는 금요일을 맞아서 활기를 띠고 있었으며 지하층에서는 게임과 파티도 벌어지는 것 같았다.
아쉽지만 내일은 꼬임브라를 거쳐 파티마로 떠날 것이다.
넉넉한 일정으로 좀 더 여유롭게 포르투를 둘러볼걸.. 다리 건너편 쪽은 제대로 가보지도 못했다.
여행사에 다녔던 후배의 '유럽에 가면 볼게 얼마나 많은데..'라는 말이 괜한 것은 아니었구나.
물론 까미노에서의 풍경과 추억과는 바꿀 수 없다.
정해진 일정도 없었으므로 더 머물렀어도 되는데 마음은 내일 떠나는 것으로 굳어 있었다.
파티마에 가서야 까미노가 끝난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았다.
더 이상 걷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째 까미노에서보다 더 많이 걸은 하루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