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잃어버린 것, 또는 잊고 있는 것
회사 앞엔 미술관이 있다.
북서울미술관.
대부분의 전시를 무료 관람할 수 있는 시립미술관이다.
무료라 그런지, 바로 코앞이라 그런지
아니면 코앞인 데다가 무료이기 때문인지 자주 가지 않았는데
모처럼 배송이 한가해진 데다가 날도 화창해서 가봤더니
다음날 일요일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상영한다고 했다.
예전에 봤었지만 내용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고
커다란 스크린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보기가 쉽지 않았기에 꼭 보고 싶었다.
이건 봐야 돼.. 무료일지라도.
영화는 소녀 '치히로'의 모험담이다.
이사 가는 날, 치히로는 이상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그곳의 음식을 먹던 엄마, 아빠는 돼지로 변해버린다.
돼지로 변해버린 엄마와 아빠를 구하기 위해 치히로는 그곳을 떠날 수가 없고
이상한 세계에 머무르기 위해선 일자리를 구해야만 한다.
치히로는 기업형 거대 온천의 우두머리인 큰 머리 할머니 유바바에게 일자리를 얻는 대신
이름 '치히로'를 빼앗기고 '센'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센이 된 치히로는 엄마, 아빠를 구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꿈이나 희망, 아니면 '나'를 잊는 것이다.
치히로를 도와주었던 소년 '하쿠' 또한 원래 자신의 이름과 이곳에 머무르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센이 되어버린 치히로 또한 머지않아 자기가 '치히로'였다는 것을 잊을 테고
왜 그곳에 머물러야 했는지 조차도 까맣게 잊게 될 것이다.
바다에 잠긴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
푸른 들판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하면서도 쓸쓸하게 마음을 정화시켜주었다.
기다랗게 늘어나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할아버지와 큰 머리의 유바바할머니,개구리와 두꺼비를 닮은 온천 식구들과 가오나시, 머리삼형제 등등... 결코 예쁘다고 할 수 없지만 개성만점, 애정 가득한 캐릭터가 그야말로 향연처럼 펼쳐진다.
일본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생기를 불어넣어주었으며(우리 애니메이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 또한 환상적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몸개그 액션도 빠지지 않는다.
무료라 그런지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상영장을 들락거리고 아기들이 울기도 해서 산만하기 그지없었지만
영화 속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나쁘지 않게 어우러졌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고서
기억 속에서 잊혔던 '나'는 무엇이었던가 곰곰이 떠올리려 애써보지만
가물가물한 건지 알기를 두려워하는 건지... 헷갈렸다.
나는 얼마나 치히로로 살아가고, 또 센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순전히 치히로로 살 수도 없고, 그래서 센과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치히로였음을 완전히 잊은 건 아닌지...
영화를 되새기는 며칠 동안 마음속에서 따뜻한 바람 같은 무언가가 일었다.
내 안의 치히로를 깨우고 싶다.
이 나이에.... 그건 무린가...
센 일지언정 그냥 살아내기라도 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