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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 1 장 나 : 더 다정한 쪽이 대체로 약자다

by 올드한

픽업을 기다리며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본다.


북위 36의 여름 날씨에도 정장을 하고 있는 남자들을 근사한 차들이 태워 간다.

말쑥하고 뭔가 프로페셔널하게 보이는 남자들.

세계경제가 그들의 손에 좌지우지 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남자들.


나 역시 같은 호텔에 묵었지만… 고작 PC 고치러 왔는데...

내 가방 안에는 온통 공구들, 케이블, 부팅 USB.


세계경제에 이바지 하기에는 너무 간접적이다….


가끔 큰 드라이버를 위탁수하물로 보내지 않고, 기내 가방에 넣는 실수를 할 때면

세계적 범죄에 가담한 취급을 받기도 했다.

가방 안에는 그런 자잘한 공구들이 아닌, 거대한 계약을 위한 서류라던지 중요한 프리젠테이션 파일 비슷한 것들이 채워져 있다고, 분수에 넘치는 가격의 가방으로 포장해봐야 공항 검색대의 X-ray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야스미나로시 같은 아름다운 노년의 일본 여성도 보인다.

희끗한 앞머리를 하고도 아주 매혹적이다.

그 과거는 아마 굉장했을 것이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대표 엔젤이었을 것 같은 느낌도 있다.

남자가 멋있게 늙으려면 머리 숱과 경제력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처럼, 여자가 멋있게 나이 들기 위해서는, 적당히 슬림한 바디와 평균을 웃도는 키가 필요한 것 같다.


다부진 체격의 대머리 사내가 그 노부인을 에스코트해서 도요타 센추리로 데려 간다.

도요타 센추리. 어떤 종류의 제약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 제약이 없었다면 롤스로이스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신 고를 수 있는 최고의 일본 승용차로 손색이 없기는 하다.

선글라스를 낀 보디가드는 어딘지 모르게 한국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인 특유의 겸양을 갖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인사 하는 습관 없이 뻣뻣하다.




뭣 때문에 이 늦은 밤에 여기 있는지 사뭇 궁금한 젊은 여자들을 본다.


같은 호모사피엔스종이구나 싶은 정도의 생각만을 들게 하는 여자가 있고

한 눈에 온갖 판타지를 떠올리게 하는 부류…


평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거구의 털복숭이 호모사피엔스종 수컷이 네안데르탈인과 극동아시아 호모사피엔스종 중 어느 쪽을 동족으로 인식해서 공격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건 다음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저기 로비 모퉁이에서 여자 두명이 나를 한 번 훑고는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시선이 옮겨진 다른 곳에는 분명 더 매력적인 남자가 있을 예정인 것 같다.

나도 더 젊었을 때는 더 오랜 시선을 받곤 했었다.

적지 않은 여자들이 서른 중반이 되도록 다정한 미소년의 용모를 유지하는 내게 마음을 두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터였다. 미소년인 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다정한 것이 문제였다. 대표적인 문제는 한 여자에게 마음을 다 빼앗겨 내 용모가 주는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한마디의 항변이나 불만의 표시 없이 단번에 승낙하고 이 밤 호텔을 바꾸려 로비로 내려왔다는 것.


보통은 ‘더 다정한 쪽이 대체로 약자다.’

좀 더 강단있고 냉정한 스탠스를 유지한 채 삶을 살았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까.

이를테면 가방 속이 진짜로 가벼운 서류 몇 장으로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40%의 확률로.

강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까.

하지만, 내가 강자일 때 세상은 어쩐지
약자의 편을 들도록 짜여 있을 것 같았다.




근사한 차들이 근사한 사람들을 다 태우고 가버려 로비가 꽤나 비워지고 있었다.


늘 묵던 도쿄 중심가에 위치한 이 호텔에 도착해서 여장을 푼 한 시간 전, 한국의 회사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이미 도쿄 근처로 출장을 와 있는 한 직원이 다른 호텔 큰 더블 베드 방에 투숙하고 있으니 방을 공유하라는. 뭐 나 역시 회사의 재정상태를 요즘 염려하고 있는 터라 기꺼이 그 지시를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그 전화 한 통이 늦은 밤 다시 로비로 내려온 이유였다.

내게는 늘 여의치 않고 만만하지 않은 세상이다.


'기내에 오를 수 없는 험한 드라이버처럼.'

내게 허락된 곳은 대체로 위탁수화물칸이다.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수도고속도로 완간선 어느 나들목 조그만 언덕 위에 세워진 호텔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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