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O26

제 1-2 장 나 : 일단 행동규범을 세우고 나면

by 올드한

나는 일단 행동규범을 세우고 나면 할 수 있는 한 깨지 않고 충실히 따르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지상과제로 삼는다. 규범이 되었다는 것은 반복을 통해 거기에 위험이나 거슬리는 것이 적고, 정신적 육체적 미신적 죄책감이 비교적 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다.

엘리베이터 두 개가 있다면 왼쪽의 것을 탈 것, 선풍기는 1시간 30분 이상 작동하지 않기, 가위나 칼은 방바닥에 두지 않고 눈에 안 보이게끔 서랍 속에 가지런히 보관하기,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하루에 2만 보 걷기와 같은. 당연히 출장지에서 숙소 바꾸지 않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외국에서 일지라도. 아니 심지어 지옥에서라도 말이다.

단 내게 자유재량권이 주어진다는 전제하에서.


어떤 면에서는 하찮고 시시해 보일 수 있지만, 아직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어쩌면 내가 만든 행동규범에 기대어 살아온 덕분일 수 있으니까. 아주 낮지 않은 정도의 확률로.


그러나 이밤, 내 행동규범에 자리 잡은 ‘언제나 이 시나가와 프린스 호텔을 이용하기’를 깨고 낯선 호텔로 택시를 타고 가야한다.



나는 뒷좌석 깊숙한 곳으로 몸을 파묻고 택시 라디오에서 나오는 FM방송의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교외를 향해 달리는 택시 안에서 듣기에는 과하게 장중한 음악이라는 생각을 했다. 팡파르가 주요 연주인 오케스트라가 있었나..

내가 외국인이라고 라디오 채널을 클래식 방송에 맞춰 준 것 같았으나 이 저녁이라면 오히려 일본어로 된 경쾌한 엔카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라디오를 꺼 달라고 하려다 룸미러에 들어온 운전기사의 얼굴을 보고는 바로 포기했다. 중년의 택시기사는 마치 발전한 자위대의 늠름한 시가지 행군을 보는 퇴역 장교처럼, 끊임없이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과 차 안을 울리는 팡파레곡을 동조 시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일본의 군국화에 대한 민족감정이 남아 있는 한국인으로서도 택시기사가 몰입할대로 몰입하고 있는

일체감을 깨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숱한 해외 출장에서 내가 꽤 여유를 즐기는 시간은 먼 목적지를 가지고 있는 택시 안에 있는 동안이었다. 떠나온 곳에서 도착하는 곳 사이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해도 지탄 받지 않는 한 두 시간. 적어도 거리는 줄이고 있다는 의미로 충분한 시간. 밤이면 밤인대로 낮이면 낮인대로 차창밖으로 보이는 생소한 광경이 좋았다.

익숙한 광경에서 남보다 익숙하게 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워서라고 해야할까.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또 한 번 여유를 즐겨보자. 두 어 시간 전 이미 한차례 같은 일을 치뤘지만.

무척 안락한 토요타 크라운.


“꽤 좋은 차예요. 토요타 크라운”


자기 차를 칭찬하는데 으쓱하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라는 심산으로

운전 기사의 등 뒤에 가까스로 초보 수준을 넘어선 일본어로 말을 건넸다.


“토요타 마크X’ 운전기사는 짧게 대답했다.


“네?”


조금 전 나는 분명히 토요타 크라운에 올라 탔었다.

내기를 해도 된다. 나는 나름 차량 매니아다.

다른 남자들처럼 슈퍼카 같은 것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간, 손에 닿는 거리에 있는 양산형 차량들을 염두에 두고 요모조모 살펴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곤 한다. 휙 하고 지나치는 앞모습을 놓친 차의 뒷모습 실루엣만으로도 차량 종류를 거의 다 맞힐 수 있다.


하필이면 마크X라니.


내가 틀렸다는 X일까 X-Ray의 X일까

눈을 부릅뜨고 몸을 내밀어 운전대와 대시보드를 확인했다.

차의 외형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차종을 알 수는 없었다.

뒷좌석 유리창은 녹색계열 필름으로 짙게 선팅이 되어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는 것만 빼면 이렇다할 문제점은 없는 차였다. 크라운이건 마크X건.

차에서 내리기 까지 한동안 판단을 유보하는 수 밖에.


마크X (후륜구동의 스포츠세단으로 택시로 출시된 적이 없는) 은색 택시를 타고

수도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왠지 이 드라이브가 영겁의 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모은 돈을 주식으로 다 잃은 날, 나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퇴근하는 차 안에서의 꼭 그때 처럼,

가고는 있지만 도착하고 싶지는 않은, 도착하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뭐 그런…


창 밖을 보았다. 짙은 필름과 구름 사이로 일본의 달이 엉기성기 보였다.

필름 때문에 달빛이 산란되고 있어서인지, 달이 두 개처럼 보였다.

하나는 보통의 달, 다른 하나는 좀 작은 녹색의 찌그러진 달.


타이거 석유 광고판, 다정하게 생긴 호랑이가 급유호스을 들고 찡긋 윙크를 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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