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나 : 어쨌거나요.
루마니아 혹은 불가리아의 어느 해묵은 숲에 있는 오래된 성인 듯 호텔은 급한 비탈길을 다 올라선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낭떠러지 말고는 있을 것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이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이쪽으로는 여기가 세상의 끝입니다라는 이정표 역할을 기꺼이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관점에서는 이승의 끝에 지어진 망자들의 영혼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 회차에는 현생에서 덕을 많이 쌓은 망자들이 몇 없는지 불 켜진 객실의 수는 얼핏 서너 개.
악업을 쌓은 망자들에게 호텔 방을 내어줬을 리는 만무하니.
잠시 생각했다. 내가 여기를 죽어서 왔을 가능성에 대해. 그리고 내 업보에 대해.
내 업보에 수우미양가를 메긴다면 '우' 와 '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음악 미술 체육 과목에서 내가 주로 받았던 점수들의 수준.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도 주변에 이렇다 할 이웃한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조망권을 누리기 위해 이런 곳에 호텔을 건축했다면 확실하게 판단미스다.
밤공기는 폐가 시릴 만큼 깨끗했고 누가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소음은 내 행동에 주의를 요하고 있었다.
이미 주차장을 차지하고 있는 몇몇 차량들에 다소 안심했지만 사람들의 출입은 없었다.
뭐 이러다가도 아침이면 사정이 크게 달라져 많은 사람들이 로비를 채우고 있겠지.
로비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전 현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혹 망령들이 그 안쪽을 거닐고 있으면 그 길로 냅다 튀기 위해.
여자 직원 한 명이 중국전통 의상인 파란색 치파오를 입고 손님을 기다리며 데스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일본 여자들은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어딘지 모르게 한국여자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한번 더 했다.
내 가설이 맞다면 (이 얼마나 기만적인 문구인가) 깍두기 도라지 고사리 진미채무침 같은 질긴 것들을 즐겨 먹는 우리와는 달리 연한 고기만을 많이 먹어 하관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다.
치파오. 청나라 만주족의 복식이다. 당 송 명대의 어느 복식도 저렇게 매력적이지는 않다.
원래는 저렇게 몸의 굴곡을 훤하게 드러내지는 않았겠지만.
그 데스크의 여자가 분명 사람인지 시간을 두고 꼼꼼히 관찰한 후 합격점을 주었다. 딱히 결점은 없었다. 외모가 너무 보기에 좋다는 것만 빼면.
남국의 바람이 한차례 급한 비탈길을 타고 올라와 호텔 외벽에 드리운 야자수 그림자를 현란하게 움직였다. 야자수 이파리들이 고대 흉수의 송곳니처럼 내 목덜미를 몇 번이고 노렸다가 물러갔다 하는 것을 피해 얼른 로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비의 회전 유리문이 돌자 바깥에 머물던 어둠이 함께 달려 들어왔다.
별빛 몇 개는 회전하는 유리문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장식을 철저히 배제하기로 뚝심 있게 결정한 로비였다. 벽에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는 보기보다 쉽지 않다.
주요 도시들의 시간을 알려 주기 위한 몇 개의 벽시계들이 전부. 뉴욕, 파리, 도쿄. 서울은 없다. 한성이 있다. 한성? 이런이런 이건 좀...
장식이 있다면 여느 호텔과는 성분이 좀 묘하게 다른 공기와 기압이라고 할까.
이걸 인위적으로 해냈다면 대단한 인테리어다.
“좋은 저녁입니다. 근사한 호텔이네요.”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외딴곳에 위치해 있죠.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고, 그래서 죄송합니다.”
내 상투적인 인사를 받은 호텔의 여자 직원은 하자 없이 인사를 돌려주었다.
목깃에서부터 가슴까지 걸쳐 있는 용문양이 그녀의 발성에 맞춰 꿈틀댔다.
불과 두어 시간 전 택시에 오르기 전까지 세계는 내게 앞뒤가 들어맞는 익숙한 곳이었다.
비록 그곳이 부산스러운 외국의 어느 호텔 로비였어도 여전히 모순되거나 이질적인 세계와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택시를 탄 이후부터 세계가 조금씩 낯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그 용문양과 함께 꿈틀대며 기어 오르고 있다.
호텔직원의 보랏빛이 도는 립스틱과 표정이 결여된 목소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백만 번 정도를 해서 감정이 아래위로 다 깎여 나간 억양.
이 이상의 친밀한 대화는 거부한다는 듯 높낮이 없이 한 음으로만 구성된 영어 억양.
두 음이었나?
저 말을 돌려줄 때는 분명 웃는 얼굴이었는데, 자기가 가진 수분의 삼분의 이를 그 말에 실어 보냈는지 이내 건조한 표정으로 돌아간 것을 목격했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의 루비는 이제 막 누군가를 할퀴고 튄 한 방울의 피 같았다.
“죄송하긴요. 여기에 호텔을 지은 데는 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겠죠.”
“어쨌거나요.”
‘At any rate’ 한국말로 하면 ‘어쨌거나’라는 무례한 말이다. 내 영어가 짧지 않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호텔 여직원과의 대화에 쓰인 언어는 영어였다.
.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두 번 젓고 돌아 서서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여기에 머물고 있을 그 한국 직원을 빨리 만나 한국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의 카메라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으로 내가 여기 왔다 간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무릇 세상엔 별의 별일이 다 있으니까 혹시 발생할지 모를 파탄을 대비한 기록의 차원에서.
그 직원은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덥석 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자제하고 짧지만 힘 있는 악수로 대신했다.
“며칠이나 됐어요? 여기 묵기 시작한 거.”
“저도 어제 왔어요. 아니 오늘 새벽이라고 해야 하나. 오랜만에 왔다고 여기 공장 직원들과 새벽까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는 바람에 날이 다 밝은 후에...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에이 아시잖아요.”
알긴 뭘 알아. 난 당신이 밖에서 보낸 밤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어.
조금 전의 반가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직원이 한심해 보임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다행히 그 직원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아 숙소를 공유하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자기가 코를 심하고 골고 몸부림도 많이 치니 양해를 부탁한다는 언급이 있었다. 나중에 합류해 방을 얻어 쓰는 내 입장을 고려해 보면 양해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은 없었을 뿐 더러 나 역시 잘 때 끙끙 앓는 버릇이 있어 퉁 칠 수 있으니 그의 잠버릇이 오히려 반갑게 들렸다.
그가 냉장고에서 꺼내 온 캔 맥주를 하나씩 나눠 마시며 회사를 걱정하는 대화를 짧게 나누고 잠에 들었다.
호텔방과 침대는 나쁘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침대가 격하게 요동치는 느낌이 있어 잠에서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