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장 나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공손한 존댓말로 자초지종을 묻고 싶었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간절히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러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저는요 한국사람이거든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요’
이 말이 먹히지 않으면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살려 둘 가치가 충분한 조건 혹은 그 존재에게도 이문이 남는 거래를 재빨리 찾아 말해야 했다.
그건 그렇고 평소에도 이런 태도로 삶을 대해야 되지 않나?
살아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태도.
온 밤이 소요되는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이 될까 나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 위에서 제자리 도움닫기를 준비하는지,
무릎을 살짝 굽히고 뒤꿈치에 힘을 모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오케스트라의 마지막 클라이맥스 카덴자 부분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나는 내장이 다 터지거나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죽어 버릴 것이다.
정신적인 충격과 물리적인 폭력을 동시에 주는 악령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동시 공격 앞에서 하루의 시간이 다 되어가는 하루살이처럼
내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다시 한번 눈동자를 움직여 옆의 함께 잠들었던 그 직원을 보았다.
조금 전 봤을 때부터 벌리고 있던 입에서 작지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입안이 바짝 말라 잠결이지만 자율신경계가 혀를 움직여 입안을 침으로 도포하는 것일까?
아니, 하얀 무언가가 그의 입안으로부터 꾸물꾸물 솟구치고 있었다.
이야기 속에 악령이 등장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사단이 난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지나가는 행인 2든 아니면 키우는 개라도.
내 위에 올라 탄 존재 외에, 또 하나의 존재가 더해진다면
주연, 조연,행인2, 개 모두 무사할 리 없다.
상식적인 사고의 수준에서, 악령에 맞설 수 있는 물리적인 방법은 아주 없다고 보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일 것이다. 이럴 때 주기도문을 다 외우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불교에 가까운 무교다. 더 가까운 쪽은 불교지만 악령을 쫓는 진언이 어느 불경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진지한 종교를 갖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거세게 일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 유독 내 삶에 불행이 더 많다는 것에 신을 의식의 가장자리로 밀어내 버렸다.
더 어렸을 때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격하게 원망을 하곤 했었지만,
지금 신의 존재는 수묵화 속 묽게 그려진 먼 산처럼 멀리 후퇴해 내 의식의 배경에 담담히 자리하고 있다.
새해의 첫 태양, 추석의 대보름달, 아주 드물게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을
매개로 삼아야지만 닿을 수 있는 존재 정도.
본격적으로 직접 신을 찾을 자격이 없는 가여운 존재로 나는 전락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무교 주제에 반쪽짜리 주기도문을 떠올렸다는 건 신성모독일지도 모르지만 종교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다. 하루 저녁에 급히 바꾸어도 되는 자유.
그리고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이 절박함은 죄의 경중을 따질 때 상당한 정상참작이 될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