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 장 소영 : 그냥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소영이 기거할 5층 방 문 앞에 도착하자 턱수염이 말을 꺼냈다.
“잠시 들어가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제 첫사랑 이야기 같은 시시한 주제가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소영이 말했다.
“그 얘기가 제일 궁금 합니다만.” 말총머리가 뜻밖에도 제법 정제된 농담을 던졌다.
보기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위해들 가하려고 구성된 콤비는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어딘가 작위적인 멘트라고 소영은 생각했다.
내 첫사랑 이야기는 온통 왜곡되어 있어.
이야기 속에 살아 있으면 실체도 살아 있을 것 같았던 사랑.
살아 남은 것들은 증식을 시도했고, 많은 IF 와 Then 을 덧붙였다..
그래서 이제는 진실이 무엇인지 나도 알 수 없게 됐다.
“밤을 세울 각오를 하셔야 될 겁니다. 그것도 이틀 밤을” 소영이 말했다.
턱수염이 잘 보라는 듯 도어락 키를 누르고 먼저 들어 갔다.
소영이 그 뒤를 따랐고 말총머리가 문을 닫으며 들어왔다.
비밀번호는 잊기 힘든 숫자, 2026.
현관에 들어서자 조명이 자동으로 켜졌다.
방 안은 한눈에 보기에도 전부 새것인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턱수염은 손님을 맞듯 의자를 가리켰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말총머리는 앉지 않았다.
“실례지만 소영님에 관해 먼저 조사를 좀 했습니다” 턱수염이 그 '얘기'라는 것을 시작했다.
“그건 괜찮아요.” 소영이 대답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예전에 천주교 신자였다고 하던데요. 맞습니까?”
“네 어렸을 때는. 지금은 그냥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 가고 있습니다”
“종교를 버리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선량하게 살고 있으니까 교리는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집중이 필요한 일을 하시게 될 텐데, 혹시 업무 중에
자주 연락해야 하는 관계가 있으신지요?”
“만남을 가지는 남자가 있느냐는 질문으로 들리는데요.”
“네 기밀을 요하는 부분도 있어서, 원래 연인 간에는 못하는 말도 없고
새어 나가지 않을 거라고 다들 생각하지만, 그런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가 기밀을 다루게 되나 보군요”
“우리가 인수하려는 몇몇 기업들에 대한 정보에 노출될 가능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건 관심 없어요, 들어도 알아듣지도 못할테고요”
“알겠습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턱수염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말총 머리는 조용히 의자를 정리했다.
‘살펴 가세요.” 소영이 짧게 인사했다.
현관을 나 선 두 사람은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본어였다.
말총 머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고 턱 수염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까지 지켜 보던 소영에게, 그 둘은 고개를 까딱하며 목례를 했다.
그 둘은 아주 오래된 파트너처럼 보였다.
서로에 대한 신뢰를 지상과제로 삼은 항해사와 조타수처럼.
소영은 방 안에 남은 공기가
쓸데없이 무거워졌다는 걸 느끼고 창문을 열었다.
멀리 서해대교가 보였다.
다리 위에는 별빛 한 개가 밤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달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먼 이국으로 추방된 망명자인 듯, 달이 그리운 밤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