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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4 장 소영 : 삼성 TV와 난초가 있는 정물화

by 올드한

냉장고를 열어 보니 기린 맥주와 진로 소주, 코카 콜라, 에비앙 생수, 필라델피아 치즈가 가득 들어 있었다.

맨 아래칸에는 이미 세척해 둔 채소와 과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주방 선반에는 고급 식기들과 컵 몇 개가 있었고, 넓은 대리석 식탁 위에는 에스프레소 머신과 하얀 전기밥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침실 책상 위에는 Dell 노트북과 LG 모니터, HP 소형 프린터가 정렬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이왕 거처를 마련해 주기로 작정한 이상, 이 정도는 해주겠다는 의지가 집 안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침실 옷장을 열자 캘빈클라인 속옷, 아디다스 운동복, 룰루레몬 요가복이 비닐 포장이 뜯기지 않은 채 걸려 있었다. 샤워실에는 오리베 샴푸와 바디워시가, 화장대 위에는 샤넬 기초화장품 세트가 막 상자에서 나온 상태로 놓여 있었다.


향수는 펜할리곤스 블루벨.

이 향수의 악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다이애나가 즐겨 뿌렸다던 영국 향수.

기본 체취가 어지간히 좋지 않고서는 경우에 따라서, 뱉어 놓은 침 냄새로 은은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


헤어드라이어는 이름 모를 브랜드였다. 바람은 어차피 방 안에 있는 공기를 쓰는 것이니,

그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준비했는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이것이 꽤 세심한 고려와 배려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탈의실의 옷장에는 아르마니 바지 정장과 디올의 치마 정장이 한 벌씩,

신발장에는 페라가모 구두, 호카 운동화, 살로몬 등산화 한 켤레씩 놓여 있었다..


가방이 있을 법한 서랍을 열 때는 조금 설렜다.

여태 모든 물건들이 브랜드 중복 없이 교묘히 배치되어 있었으니까.


주황생 가방에 담긴 에르메스 벌킨백이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쌤쏘나이트 백팩이 있었다.

백팩 아래에도 옆에도 안에도 나의 에르메스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그 사람들도 그건 좀 무리였겠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것과 미쳐 돌아가는 것 정도는 구분을 잘하고 있겠지.

사실, 어제까지의 소영에게는 쌤쏘나이트 가방도 명품 반열에 자리잡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힘이 좀 빠져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최신형 벽걸이 TV가 거실 벽면에 매달려 있었고

낮은 테이블 위에는 동양란 화분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아 ~ 난초는 손이 많이 가는데. 싫어’.


무늬 없는 벽지에 걸린 TV와 그 아래 놓인 난초를 보며 소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폴 세잔이 그린 ‘에르메스 벌킨 백은 없고, 삼성 TV와 동양란만 있는 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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