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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1 장 나 : 아카사카의 어느 호텔

by 올드한

사진 속의 두 여자 중 통통한 쪽은 지난밤 살해되었다.
다른 한 명의 여자는 아직 신원을 특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한 우연이지만, 그 사진의 한쪽 구석에는 내 뒷모습도 함께 찍혀 있다.
그게 나라는 사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만이 알고 있다.


식사를 마친 뒤 그 남자와는 간신히 헤어질 수 있었다.
가급적 뒷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 출구까지 걸었다.

로비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는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로 뒤로 미끄러지듯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


내가 잠시 여장을 풀었던 방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호텔에
계속 묵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호텔을 바꾸면 이 맥락 없는 이야기에서
나만큼은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건의 시발점이 이 호텔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날 밤, 나는 호텔을 옮겼다.
회사와 계약이 되어 있는 아카사카의 어느 호텔이었다.


오후에 회사의 경리 여직원이 귀띔해 준 말.
오늘 이 호텔을 이용하는 회사 직원 중 누군가가 마침내 100번째 투숙객이 되며,
그 사람은 최고층 바 무료 이용권을 받게 된다고 했다.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밤. 신경을 좀 누그러뜨리려 바에 들렀다.

바에는 <스위트 로레인> 라이브 버전이 흐르고 있었다.

역시 이런 공간에는 재즈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거의 자연 법칙에 가깝다.


내 테이블로 찾아 온 바텐더에게 커티삭 스카치 하이볼 한 잔을 주문했다.

주문하는 내 일본어에는 간사이 사투리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부산 사투리.


내 한국말에도 그러한 경향이 좀 있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모르지만, 부산 출신이 수도권에 올라와 부대끼고 살면서 부산 성조를 아래 위로 다 깍아 낸 억양. 선택하는 어휘와 말의 시작은 철저히 표준어 인데, 말의 중간을 지나 마무리로 가면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미묘한 차이.

그 차이가 어떨 때는 매력적으로 들린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때부터였다.
아까부터 책을 들고 있던 한 여자가 책을 자기 눈높이보다 조금 내려
멀리서 나를 노골적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걸.

보통은 옆 테이블 사람들이 무엇을 주문했는지,
그게 실제로 얼마나 근사한지 훑어보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정도다.

하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시선이 아니었다.


‘내가 007 로저 무어도 아닌데, 이런 곳에서 한가하고 달콤한 로맨스를 시작할 수는 없잖아’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저기요”

커티삭을 들고 온 바텐더라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요, 아무래도 바람을 맞히려나 봐요”

나를 쭉 관찰하던 그 여자였다.


“전화를 해 보시는 게” 내가 말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요. 경찰이라 이럴 때가 종종 있어요.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죠”


“친구 분이 강력반이나 그런 쪽이겠군요” 내가 물었다.


“아뇨, 교통과 여경이예요. 한직이죠” 그 여자가 말했다.

“교통과 여경들이 요즘 좀” 하다가 나는 말을 흐렸다.


“오사카 분이시죠?” 그 여자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었다.

“아뇨 한국 사람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얼굴울 찡그리며 그 여자는 내게 왔을 때 처럼 쿨하게 떠났다.

외국인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듯.


그러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 가서 책을 다시 들었다.


고급 콜걸인가.

고급 콜걸 치고는 너무 수수한데.

초고급 콜걸이라면 오히려 저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스카치를 마시고 바를 나서려는데, 아까 그 여자가 머리가 막 벗겨 지기 시작하는

중년 남자의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합석하는 모습이 보였다.


호텔 방에 들어 와 씻고 누웠을 때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나는 그 기시감의 출처를 천천히 더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퍼즐 하나가 제자리를 찾았다.

‘아.’

‘죽은 여경과 함께 찍혀 있던 사진 속의 그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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