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 장 나 : 두 개의 꿈을 꾸었다
성희? 영주? 혜주? 아인? 채현?
제길, 도무지 이름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애초에 그녀의 이름 같은 것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나였으니까.
떠오르는 건 근사한 석양을 배경으로 활짝 웃어 주던 모습 뿐이니까.
사실은 그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녀의 얼굴 같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조금 전 호텔 바에서 실로 오랜만에 이성의 유혹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일에 대해 후회할 것도, 우쭐해할 것도 없었다.
알코올이 마음의 결을 느슨하게 풀어 놓았는지,
오래전에 헤어진 그녀의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뚝 떼어 단단하게 밀봉해 두었던 영역이었다.
하지만 밀봉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봉인에 쓰였던 재료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며
내용물을 덮쳐 버렸다.
마치 적석목곽분 위에 얹힌 돌들이 결국에는 썩은 목곽을 깨고
유골 위로 쏟아지도록 설계된 것처럼.
그녀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지금이라도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왕비가 되어 있거나,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수조 원의 자산을 굴리는
거부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나를 선택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글쎄.
아마 욕지기가 먼저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자야 한다.
더 오래 깨어 있으면 내일 귀국행 비행기를 타는 일이
괜히 힘들어질 것이다.
두 개의 꿈을 꾸었다.
“존, 존. 이제 당신 차례예요!”
발밑의 땅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어떤 곳은 이미 꺼져 있었다.
지구는 멸망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수준의 재난 한가운데에 있었다.
헬기 한 대가 다시 강하를 시도했고, 구조 임무를 맡은 여성 대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은 존인 것 같았다.
대부분은 이미 구조되었고, 이제 내가 헬기 사다리로 뛰어오를 차례였다.
그 순간, 내가 디딘 땅이 아무 소리 없이 꺼졌다.
나는 뛰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소영아!”였다.
또 하나의 꿈에서는
입양을 보내진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낯선 식구들의 어딘가 떨떠름한 시선을 받으며
낯선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더니
갑자기 뒤돌아 전력으로 뛰었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고
이제는 아득히 멀어지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할머니, 할머니.
나 말 잘 들을게. 밥도 조금만 먹고.”
그 순간,
저 멀리 서 있던 할머니의 얼굴이
소영의 얼굴로 천천히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