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장 나 : 방주가 곧 떠나니 어서 오르라
하네다 발 김포 도착 오후 6시 30분 비행기.
면세점들을 스치듯 지나며 걷고 있다.
비행기 출발 두 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하라는, 만국 공통의 공공연한 규칙 같은 것이 존재하는 이유다.
명품 숍 하나하나 눈여겨 보고 들어갈 일 있으면 들어가라는.
샤넬, 디올, 생 로랑 그리고 에르메스.
가지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명품이 이 브랜드들 중 하나에 속해 있다면,
죽는 것 보다는 구매를 하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다.
단 에르메스를 제외하고.
오메가 숍이 보인다. 007 대니얼 크레이그의 시계다.
죽을 것 같다.
거기를 다 지나치면, 이번에는 유니클로다.
'여기까지 빈 손으로 온거야? 그럼 이건 어때?' 뭐라도 하나는 사서 일본을 떠나라는
공항의 무언의 권유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가격대의 옷이라면,
회사에서 무상으로 제공한 유니폼들이 이미 옷장 안에 충분히 쌓여 있다.
화장품 숍을 지난다.
세계 어느 공항이든 화장품 숍 반경 20미터 안으로 들어서면 비슷한 냄새를 맡게 된다.
온갖 계열의 테스터 향수들이 뿜어져 섞여 있는 냄새.
펜할리곤스 엔디미온 같은 향이다.
중산층의 향.
그러고는 초콜렛과 술, 담배를 파는 면세점이다.
회사의 여직원들을 위해 초콜렛을 몇 상자 샀다.
스타벅스에서 카페라테를 한 잔을 받아들고 대한항공 게이트 근처 의자에 앉았다.
공항의 소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그렇듯 이상한 면이 있다.
전체적으로 고장 난 전축 같은 소리를 낸다.
현실의 높이에서 살짝 떠 있는 소리.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여러 가지 언어들로 말하고 있고,
그 위쪽, 하늘 가까운 곳에서는 어떤 계시처럼 안내 방송이 흐른다.
‘방주가 곧 떠나니 어서 오르지 않으면 너희에게 삶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바로 앞, 음향이 꺼진 TV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신주쿠 여경 살해 사건이 속보로 다뤄지고 있었고,
그녀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이 몇 번이고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 화면 속에 내 뒷모습도 여러 차례 보여지고 있었다.
‘이거야 원, 스트립쇼을 하는 것 같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 좀 보세요 여러분들. 저 사람이 나예요’ 라고 선언해 버릴까.
게이트가 열리고 나는 탑승을 서둘렀다.
비행기 입구에 비치된 스포츠 신문 하나 경제 신문 하나를 빼 들고 내 좌석을 찾았다.
이륙 전의 분주함이 잦아 든 뒤 스포츠 신문을 펼쳤다.
역시 일본은 야구의 나라답게 오타니의 일거수일투족으로 지면이 가득 차 있었다,
일본인 오타니에 대한 거부감은 대체로 없다. ‘거의 없다’와 ‘아예 없다’의 중간쯤이다.
스포츠 신문 마지막 장, 구석에 아주 작게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 17세 소녀. 문예춘추 공모전 대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