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 장 나: 오늘은 하늘에 용무 없음. 이상.
대한민국 부산 해운대구의 어느 넉넉치 못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아끼고 삼가하고 순종하는 것만이 미덕이라는 삼엄한 훈육 속에 키워져 삶이 펼쳐지는 모든 곳에 하향지원하며 살다가, 타고난 성실함과 무던함으로 어디에서도 내팽개쳐지지 않고 살아 남아 조직의 말단으로 시작해서 IT 팀장 자리까지 오른 뒤 잦은
일본 출장을 다니다가, 한 번은 목숨이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던 때 까지의 이야기 입니다. 후일담에 의하면 그 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끝.
이 이야기 줄거리에는 특별한 의미도 교훈도 없다. 다만 꼭 있어야 할 부분은 제대로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는 점이다.
조금 더 입이 헤 벌어지는 으스스한 디테일을 첨가할 수 있지만, 기억에 남겨질 이야기로는 이 정도 요약이 딱이다. 필사적으로 한 요약이었다.
현해탄을 넘어, 이제 그 후일담 부분을 살러 가면 되는 것이다.
“팀장님, 잘 다녀 오셨어요?” 여직원 한 명이 반갑게 인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손에 들린 페레로 로쉐에게 한 인사였다.
“응, 덕분에 아주 잘 다녀 왔어요. 별일 없었죠?”
초콜릿을 건네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바로 문을 열고 나와야 했다.
팀원들의 책상 위가 어딘가 달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 없는 사이에 노트북 전부 교체했습니까? HP에서 Dell로?”
여직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 년 전에 Dell로 바꿨잖아요, 팀장님?"
“이 년 전?”
“네 아마 그쯤에요” 다른 남자 직원이 한없이 중립적인 어조로 거들었다.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아무의 얼굴도 응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왔다.
“계약 해지는 갑작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실수를 한 건 맞지만요. 그 시기엔 다들 반도체 수급이 어려웠거든요.
Dell은 군납 업체라 당시 미국 정부의 반도체 우선 지급 대상이었고요.”
평소 안면이 있던 HP 영업 담당자가 내 전화에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이 년 전 HP의 느린 대응에 실망한 내가 Dell로 거래처를 바꾼 걸로 보였다.
그렇다고 한다.
일본을 함께 다녀온 내 노트북 가방을 열어 보았다.
은색 HP가 아닌 짙은 회색 Dell 노트북.
두서 없는 사색을 아주 오래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사무실을 나섰다.
수도권 공업도시에 지어진 7년 된 공장.
지평선이 보일 만큼 우두커니 홀로 선 건물.
어떤 저녁에는 ‘고통스럽게 아름다운’ 석양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마 해가 바다 쪽으로 지기 때문일 것이다.
밤은 많이 어두웠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없다.
삭과 망을 따지자면, 오늘 하늘은 오른쪽이 조금 먹혀 들어간 달을 띄어 놓아야만 했다.
금성은 있었다. 헬기인지, 느린 비행기인지 모를 것들이
붉은 등을 점멸하며 아득한 곳을 날고 있었다.
그런데 달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오늘은 하늘에 용무 없음. 이상’ 이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