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OE6

제 9-4장 소영 : 세상이 멸망하는 고통

by 올드한

IR자료, 채용관련 정보, 새 프로그램 소개, 고객의 소리를 때때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평소’ 소영의 업무였다.

얼핏 보면 고급 지식노동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내일 해도 되는 일을 오늘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업무는 늘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소영이 최근 가장 집중하는 일은 일본 쪽의 사건사고를 검색하는 것이었다.

키워드는 ‘신’, ‘사이비’, ‘호텔 사고’ 그리고 ‘도쿄 한국인 남성’.

걸려 나오는 뉴스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옴진리교, 호텔 ‘사고’ 팔 때 유의 해야 하는 다섯 가지 포인트들,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자친구의 교제 살인 같은 뉴스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와 눈곱만큼이라도 닿아 있을 만한건, ‘한국인 남성의 일본 여성 교제 살인 사건’ 뉴스일 것이다.

상단에 걸린 뉴스를 읽었다.


도쿄 시내의 한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현직 여경인 20대 여성.
객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가슴과 복부에 강한 압박의 흔적이 있었다.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결국 사망했다.
검은 옷차림의 남성이 현장에서 도주했다는 제보가 있었으나
경찰은 신병 확보에 실패했다.

일본 언론들은 한국인이라는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혐한 감정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고 전했다.
경찰은 교제 살인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 중이라고 했다




현재의 일본 여경은 자동 권총을 소지한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치안이 안정된 나라에서는

그것이 허리춤에 달린 키링 같은 장식품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여경은 권총을 손에 쥐지 않은 채로 벌거벗고 침대 위로 오른 것이다.

소영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어느 나라에서라도 비슷하게 쓰였을 법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사건 기사와 사진이었다.

기사 아래에는 CCTV 사진이 붙어 있었다.


다만 사진이 이상하게도 조금 다정하고, 조금 그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가까이 찍힌, 등을 보인 남자.
멀리, 살해된 여경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그 느낌의 발원지였다.




집 앞 어두운 골목에서
귀밑 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
돌아서서 비탈길을 내려가던 그의 뒷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눈에 새겼다.

천 번도 넘게.

머지않은 날에는 밤마다 헤어지는 일 같은 건 없어질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이루어졌다.
결과는 같고 내용은 다른 방식으로.


얼마 전 회사는 기존 요가 프로그램에 더해 여성 호신술을 도입했다.
일본 전역의 인스트럭터 인터뷰가 홈페이지에 올라왔고,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여자가 있었다.

여성인 자신은 알 수 없는 영역이지만, (연습이라 해도) 당하는 남자들은
‘세상이 멸망하는 고통’이라며 바닥을 뒹군다고 했다.


급소차기를 주저 없이 쓰라고 말하던 강사. 왠지 친밀감이 느껴졌던 여자.

사진을 보며 소영은 생각했다.
아마, 그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2OE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