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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한 Feb 17. 2023

에세이 : 우아한 삶


시골에 위치한 공단의 늦겨울에서 느끼는 감상은 '황폐'이다.


스치는 이방인들에게는 '고즈넉'일 수도 있지만 나같이 한 동안을 여기서 살아 낸 원주민에게는 황폐라는 단어의 입장 순서가 더 앞이다.


무엇이 내게 황폐를 떠올리게 하고 있을까.


겨울, 인적 없음이나 바람에 이는 윤기 없는 흙먼지 때문일까.

버려진 공장들이 뿜어내는 음산함 때문일까.


아니다. 나는 어쩌면 그런 을씨년스러운 것들을 더 즐기는 성향의 사람이다.






사람들은 망가지거나 엉망이거나 경제적 시간적 여유 없는 생활이면, 삶이 황폐해졌다고 한다.

 '비옥함이나 풍요로움'의 반대 의미로  거칠고 메마른 환경이나 마음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 '황폐'.   


인간의 경험은 상실로 가득 차 있어, 사회 혹은 대중이라는 커다란 비인격체에  자신을 비호해 주는 높은 도덕(자신이 '선'이라는 전제하에)이  (이번에도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주로 황폐함을 느낀다. 자신을 비호해 주는 힘이 없다면  스스로는 너무나 나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목표도 상실해 버려  표류하며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영혼의 황폐함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다.

황폐가 아직 영혼에는 닿지는 않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으로 보아.






내게 있어  황폐의 반대말은 그런 것( 높은 도덕의 존재 유무 )에 아랑곳하지 않거나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는 '우아함'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현실과 대립함을 주저하지 않고 사는 것.


즉, 자판기 음료수 700원짜리를 먹고 싶은데 잔돈이 600원 밖에 없을 때 100원을 빌리러 사방천지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우아함을 찾아볼 수 없다.

1,000원짜리를 꺼내 들거나 아예 먹지 않아 버려야 우아하다.

아무도 100원을 빌려 주지 않거나 가지고 있지 않아 700원 음료를 먹는 것에 실패했을 때, 세상이 각박하다느니 황폐한 현대사회라느니 말한다. 그런대로 현실에 순응하여 600원 음료로 대체하는 것 역시 우아하지 않다.  자판기가 받아 주지 않는 10,000원짜리를 꺼내 들어 1,000원짜리 열 개를 가진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도 웃기긴 하다


한국의 급속한 모더니즘과 스타일리시한 트렌드 속에서 우아함은 클래식함과 혼돈되기도 한다.  품격 있는 거실이나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재규어 차의 곡선을 우아하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렇지 못한 주위에서, 성공적이건 아니건 유행과 타협/굴복한 흔적을 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것에는 '엔틱하다'라든지 '클래식하다' 혹은 '잘빠졌다'라는 표현이 좀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시골에 위치한 공단의 늦겨울에 이르러 느끼는 감정은, 내가 선택해서 사는 곳이 아닌 패배자로서의 삶'이 현재 진행 중인 '황폐'이다.   돈벌이 그 하나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타협해서 사는...


첫 번째 회사를 떠날 때  승리자로서 살아가겠다고 했었다. 

스스로에게만 다짐하고 말지  괜히 여기저기 비장하게 선언을 해 가지고...


전혀 우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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