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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한 Feb 16. 2023

에세이 :  미술 시간 , 미술 선생님

오래된 이야기


층간 소음에 넉 달을 시달린 후,  끝내 이사를 결정하고 짐을 싸던 중  코팅된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채색되지 않은 장미 달랑 두 송이.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순간,  정수리에서 기억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맞은편 텅 빈 하얀 벽에 영상을 쏘았다.  한참 동안  영상을 보았다.


이사를 하다 말고  잠시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조금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 한 명과 이윽고 결정한 곳은 연못가였다.


거기엔 잘 자랐지만 너저분한 한 무리의 장미꽃이 있어 우리는  그것을 그리기로 했다.  

다른 아이들은 좀 더 전통적인 풍경을 가진 곳이나 화려한 장면을 그리러 간 것 같았다.

 

장미. 꽃들의 여왕.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 장미속에 속하는 식물의 총칭.

자세히 보면 그리 예쁠 것도 없는 이 식물을 사람들은 왜 그리 좋아할까.

한 다발로도 그렇고 한 송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는 유일한 꽃일 테다.  

 

미술시간은 언제나 곤혹스러웠다. 

미술시간에 필요한 도구와 재료를 살 테니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 없는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다. ( 돌이켜 보면 그렇게 궁핍한 가정환경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소한으로 사는 엄격함은 예체능이라는 것을  다급한 순위에서 지웠었다)  누나 형과 함께 썼던 물감은 언제나 몇몇 색깔은 없고 대부분 말라있었다. 


 그러나 그날 젊은(예쁘다기 까지는 아닌) 여자 미술선생은, 두 시간 동안  크로키만을 하도록 해주었다. 

필요한 건 오로지 스케치북과 4B연필 지우개.  그것이 준비물의 전부라는 것을  들었을 때는 마치 방학 둘째 날 오전처럼 한가하고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었다.




스케치북 왼쪽 하단에 장미꽃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조형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줄기와 강한 가시들 그리고 관능적인 꽃잎을 그렸다. 그 식물이 생물체로서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순서대로.

장미 두 송이를 그려 놓으니 마치 후기인상주의 미술에나 나오는 그것과 같았다 ( 물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평소의 나처럼이 아니게 그림을 그렸다는 느낌을 받고 있을 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누군가가 함께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잘 그렸네. 큼지막하게"  미술선생이었다. 

 

나는 친구와 미술선생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친구 녀석에게 마지막 시선을 주며

팔로 그림을 가렸다


여기 관심 두지 말고, 다른 곳으로 다른 부잣집 애들이 그림 그리고 있을 곳으로 빨리 가라고. 

 

미술선생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오른쪽에는 뭘 어떻게 그릴 거야?"

 

오른쪽에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작은 장미꽃과  그 너머에 보이는 연못을 그리려고 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것이 내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미술에 대한 포름 아니겠는가.

 

"오른쪽은 안 그려도 될 것 같애. 지금 그대로 너무 좋아.  꼭 뭘 그리고 싶으면 다음 시간에 그리자"

 

좋든싫든 언제나 정해진 시간 안에 뭘 마쳐야 마무리가 되는 경직된 훈육을 받아 온 내게 찾아온 자유라는 것의 느슨함. 

 

내성적인 아이에게 다가가는 그 미술선생의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치더라도  그 따듯한 관심은 내가 공교육을 시작한 이래 드물게 받아 보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미술시간.

폭력과 압제와 가학으로 삼엄한 오래전 남자중학교. 


운동장 왼쪽 귀퉁이 연못이 있는  숲.  숲을 에워싼  촘촘한 침엽수 틈 사이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조그만 바위 위에 앉은 두 명의 학생 그리고  한 명의 여자 선생이 연못 위  눈부시게 산란하는 햇빛을 배경으로 수채화인 듯 내 기억에 박혀 있다. 


모든 물감이 풍족히 발려 있는 채로.

 

그리고 그 기억의 스케치북 오른쪽에는, 

안경 쓴 얼굴과 실목걸이, 끝이 둥근 목깃으로 된 흰색 블라우스, 검정 스커트.

그리고 쪼그려 앉아서  눌려진 종아리, 발목 끈이 있는 구두를 신고 있는  그 미술선생이  세 번째 장미 송이로 이후에  덧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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