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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한 Feb 22. 2023

일상 : 어느 아침 아주 색다른 샤워

핸드폰 알람이 이제 일어나라고 난리법석이다.

아무리 정겨운 멜로디를 선택해 두어도 저놈의 알람 소리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

저걸 부셔야 하나...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몇 시에 잠이 들었었나를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났는지 다시 처절하게 깨닫는다.


언제나 늦게 잠드는 이유는 다음날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모은 돈을 전부 다 잃었고, 상당한 빚에 시달리고 있으며, 건강도 장담할 수 없는 내가 차갑고 외로운 원룸에서 막 깨어났다.

그래도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이 아침 알람이 울렸다는 것.  

그것은 다녀야 할 직장이 버젓이 있다는 사실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샤워하는 시간은 매번 두렵다. 

세찬 물줄기에 눈을 감으면 이내, 괴로운 잡념들이 눈 바로 뒤에서 날뛰기 때문이다. 

 ‘탐욕이었어. 그러지 말아야 했었어. 내가 미쳤었지’




나름 영민하다고 줄곧 생각했었다.

옛날. 주식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을 때 초심자의 행운으로 치부하며 경거망동하지 않았고 

하찮아(적어도 내가 보기엔) 보이는 아이템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지인들에게 진심 어리고도 이성적인 걱정을 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삶에는 무릇 이성과 냉정을 모두 마비시키고 마는 소용돌이가 몇 차례 휘감아 오기 마련.





내가 내게 저지른 과오의 크기가 때때로 작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고, 또 다 잊고 타인들과 웃고 떠들며 어울리기도 하지만, 객관적인 내 현실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자책과 회한으로 가득 차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이다. 


11억.  평범한 직장인이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평생을 모아야 손에 쥘까 말까 한 크기의 액수. 

사람들은 내가 그 정도의 돈을 날렸다는 것에 동정을 보내는 것도 잠시, 어떻게 그만큼의 현금을 모을 수 있었는지 더 궁금해하는 눈치다.


꽤나 오랫동안 엘리트코스를 밟았거든. 그럼에도 나 자신에게 무언가 근사한 것들을 단 한번 사주지 않을 정도로 죽자 살자 모았고...





이런 날들을 보낸 지 어언 4년째.

병은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몸으로도 옮겨 가고 있다는 느낌이 뚜렷하다. 심장이 가끔 느닷없이 뛰고 무엇보다 안색이 어둡고 푸석해져서 거울을 잘 보지 않게 되었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 보다 더한 지옥을 살고 있는 사람도 적잖이 있겠지만, 매일 아침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생기를 캐내지 않으면 나 또한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딱히 없는 나날의 연속이다.




샤워기를 틀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한 푼이라도 아끼려 한겨울 냉골에서 자고 일어난 몸 위로 따듯한 물이 쏟아졌다.

그 안 쪽만큼이나 어지럽게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을 위로하듯 쓰다듬으며 따듯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행복했다.

다 떠나서 행복했다. 

그리고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옛날 할머니께서 내 귀밑머리 쓰다듬어 올려 주며 다 괜찮다고 하시면 더 크게 울어버렸던 것처럼.

 

그래 지금 이 순간 따듯한 샤워가 전부야. 딱 적당한 온도야.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직 않은 미래는 지금의 샤워하는 나를 실재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아.

그저 내가 나를 스스로 괴롭히며 현재를 망가뜨리고 있을 뿐이야.

아픈 기억을 매일 생생하게 떠올려 희미하게 잊혀질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고 있고,

수많은 부정적 가정으로 미래를 어둡게 그리고 있어.  

너무 많은 에너지를 과거와 미래의 허상에 뺏기며 살고 있었어.

현재를 위해 에너지를 오롯이 써야 해. 




다른 날 보다 샤워시간은 좀 더 길었다. 

마치 태어나 처음 몸을 씻어 보는 것처럼.


이번엔 지나치지 않고 현관의 큰 거울에 비친 내게 손을 높이 올려 하이파이브를 했다.

‘으이구, 짜식아 좀 잘하자.  파이팅이닷!’


출근하는 차 안. 

앞에서 옆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다 새롭고 아름다웠다.

10년을 오고 간 길인데 

마치 처음 해외여행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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