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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한 Jan 28. 2023

2. 그녀의 긴 이야기 속 나의 출연 비중은 얼마큼일까

TV에 정신이 팔려 있는 엄마의 모로 누운 뒷모습을 본다.


TV에 나오는 내용은 내겐 심각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것들이다.

백 번은 이미 봤을 법한 사극들, 우리 집엔 전혀 필요해 보이지 않는 물건을 파는 홈쇼핑 광고들.


그 자세로 잠이 들었는지 보려 가까이 다가서 봐도 나를 인지하지 못한다.

엄마가 사극 장희빈에서 꽂히는 인물은 희빈 장 씨도 중전 인현왕후도 아닌 그 회 차에 가장 많은 분란을 일으키는 배역이다. 엄마가 홈쇼핑에서 주시하는 것은 팔고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떠드는 호스트다.


엄마의 눈으로 본 사극 장희빈은 이러하다.

허준이 임금 숙종이 되었다. 의원 노릇은 이제 그만뒀는지  궁금하다. 

친 아들을 중전에게 뺏긴 착한 장희빈이  너무 불쌍하다.

중전은 일부러 아픈 척 착한 척을 하는 요사스러운 여자다.


이렇듯 등장인물들이 맡은 캐릭터는 전부 왜곡되어 일그러져 있다.

드라마 본연의 의도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말이다.

엄마는 분명 적어도 나와는 다른 의식 세계에 있다.


그 다른 의식 세계에선 내가 어떻게 비쳐지는지 알 길이 없다.

엄마에게 나는 이러이러한 존재일 것이라고 추측하여 믿는 내가 완전히 틀릴 수 있음이다.

내가 엄마의 전부 아니면 최소 절반 정도는 될 거라는 내 믿음 말이다.




아주 오래전, 

지금처럼 기억력이 흐리고 총기가 없는 증상과는 도무지 연관 지을 수 없던  비교적 젊었던 날.

골다공증으로 인한 척추압박골절 수술을 위한 수면마취 중 엄마의 의식은 수술실에 있지 않았다.


친구들과 뛰놀던 천년 고도 경주의 고향 마을. 그 산과 들.

가장 찬란했던 삶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기억 회귀현상이다.

나라는 존재는 거기에 끼지 못했다.


나 역시 인터넷쇼핑 때문에 주소 입력 요구를 받았을 때, 예전 살았던 곳의 주소를 타이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무심한 타이핑이 완성해 놓은 주소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살았던 주소였다.


남들보다 더디게 마취에서 돌아오는 엄마에게 왜 그랬는지 그게 매뉴얼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사 선생님이 형제자매가 몇 명인지 물었고 엄마의 대답은 아주 의외였다.


남동생 넷, 여동생 셋.

뭐라고? 외삼촌 셋, 이모 둘 아니었나?


마취 상태의 헛소리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이내 알게 되었다. 배다른 동생들이 또 있다는 것을.  

우리와는 단 한차례의 면식도 없는 그들을 잊고 산 적이 한 순간도 없었다는 것을.

의사 선생님에게 말해 드렸다. 정확히 기억하신다고.


엄마는 가슴속에 의외로 많은 인물들을 안고 살고 있었다. 




엄마에겐 딸이 한 명 있다. 내게는 하나뿐인 누나이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가혹한 운명에 고개가 뚝뚝 떨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 누나다.

나는 그런 누나를 있는 힘껏 도왔다.

가게를 세 개나 열어 주었고 조카의 학비를 대주고 매형의 자동차를 세 번 바꿔 줬다.

그러나 가게는 여는 족족 망했고 조카와 매형은 고맙다는 인사가 없었다. 

성인군자가 아닌 나는 당연히 누나의 능력과 안목 그리고 매형과 조카의 염치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그 일로 옥신각신하다가 연락을 끊고 사는 중이다.


몇 년 전 누나는 유방암 3기 판정을 받아 투병 중이다.

타인의 고통에 좀처럼 공명하지 않는 나지만 누나의 소식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엄마는 제법 오랫동안 누나를 간병하며 매형과 조카를 위해 밥을 했다.

감히 짐작하건대, 녹녹지 않은 삶에 대한 동질감은

아들인 나에게서부터 오는 것보다 딸에게서 더 빠르고 쉽게 다가오는 것 같다.

같은 성(性)이 부여하는 빠르고 쉬운 감정의 접근성일 것이다.


‘딸이 아픈 덕에 딸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 좋다’는 말에 나는 공연히 슬퍼졌다.

설사 그렇기야 하겠냐만 엄마의 외로움이  가까이서 뿜은 담배연기처럼 내게 베어 왔다.


어쩌면, 아주 높은 확률로  

누나와 나의 드라마는 내 의도대로 엄마에게 상영되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전과 장희빈처럼.




그래, 아무래도 좋다.

누가 악역이건 그게 지금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용서받고 싶은 게 하나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 중 내가 차지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더 적었으면 하는 죄스런 바람을.


못나고 모자라지만 염치는 있고 싶은 아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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