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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한 Mar 18. 2023

잡념 :  본가 이사

부산 본가가 곧 이사를 한다고 한다.


난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많이  과거지향적인 내가, 이만한 이벤트에 아무런 감상이 없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서양 건축양식이 비잔틴, 바로크, 르네상스 등으로 변했듯이 

본가는 초가집, 슬레이트집, 슬라브집의 모습으로 같은 터에 수십 년을 버티고 있는 중이다.

우주 종말의 시간까지 거기 있을 줄 알았는데,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고 한다.


어느 쪽인가 하면,   묘하게 슬픈 쪽이긴 하다.






토요일.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수많은 세월을 뒹굴었던 내 방.


거기에 버리지 말라고 당부할 것들이 무엇이 있나...




우선, 머리 말리며 로션 바르던 옛날식 앉은뱅이 화장대 왼쪽서랍,

 그 안에 누구와 나누어 꼈던 ( 명분은 없어졌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는 ) 실반지가 있고,

그 오른쪽 서랍에 수백 장의 유럽여행 사진들이 있다.

코털 뽑던 족집게, 오래된 외국동전들이 사진 아래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그마한 옷장 맨 윗칸 왼쪽 서랍 안에는 (보험쟁이를 친구로 둔 벌로 받은) 많은 보험계약서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 내 모습이 ) 그리운 대학생활의 사진들이 수북이 있다. 


맨 아래칸 왼쪽에는 오성식생활영어 48개 테잎세트와 야시카 필름카메라가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 서랍 안에 있는 내용물을 떠올려 내고는


내려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급기야 들어 벌떡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보내고 받은 편지들. 


보내지 못한 편지들. 


습작들의 뭉치들.


아팠던 몸을 가족들에게 숨기고 싶어 꽁꽁 감춰 놓은 병원진찰 기록들.




그건 버려서도 아니 되고, 분류되어 보관되기 위해 누군가에게 읽혀서도 안되는데...



낯설고 생뚱맞고 충격적인 


 막내아들의 깊은 슬픔과 사유가 담겨 있는 서랍 칸.



연로하신 어머니의 눈을 대번에 적실만큼 슬픈...



아~~ 내려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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