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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인 Feb 28. 2020

앤틱을 누가 살까 08-수입은 어려워

벌써 20년!! 달고 쌉스름한 자영업분투기 19

한국 딜러들이 찾는 물건들이 비슷해서인지, 벼룩시장을 다니다 보면 한국 딜러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한날은 어떤 시계 좌판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데 시계방 주인이 나더러 앞에 나간 저 한국사람들을 아냐고 물었다. 왜 그러냐 되물으니까 자기가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나더러 꼭 좀 대답을 해달란다.      

그 사람 말인즉슨 한국인의 흥정 법이 원래 반을 깎는 것이냐. (오호라... 동남아 흥정 법을 여기서 들이대는 사람들이 또 있군) 자기가 앤틱 도매상 수십 년째인데 이상하게 한국 딜러들이 꼭 반타작으로 깎고 시작하는데 표정조차 당당해서 오히려 자기가 진짜 이상한 가격을 부르고 있나 황당하기까지 하다고 영어 말마디나 하는 니가 오늘 꼭 답을 좀 달라고 답하기 전에는 보내주지도 않을 태세로 다부지게 물어왔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예전에 동남아 여행 가면 시장에서 흥정할 때 반값으로 시작하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동남아 여행 가서도 차마 면구스러워서 써먹지 못한 방법이었다. 


니가 필시 나를 호구로 여기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구나. 그런 작심이 없이는 상대방이 부른 가격을 그렇게 깡그리 무시하고 내 값으로 부르기는 어려운 터였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한국사람들이 다른 건 아니라고 잘 달래주고 싶었지만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닌 듯이 진심 궁금해하는 그 양반한테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근데 또 다니다 보면 이태리 상인들이나 중동 상인들도 어마 무시하게들 깎으니까 꼭 한국 사람들만 그런 건 아닌데 같은 한국인이라고 꼭 찝어서 왜들 그러냐고 항의한 걸로 봐서 거기서도 약간은 비아냥 같은 동양인 무시가 있었던 건 아닌지. 나중에 생각하게 되었다. 아... 이 서양인들의 약간은 자격지심 같은 모자람이 보이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결론은 어디나 모자란 사람이 있고 어디나 특정 집단을 비하하거나 또는 너무 저자세로 굽히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았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 그래서 다음부터는 한국인 어쩌고 저쩌고 하는 질문은 초장에 사양. 

너의 수준이 딱 거기구나. 인생 더 살아봐라. 싸잡아서 욕하는 못된 버릇 고치게 될 테니.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컨테이너 단위로 수입을 하게 되면서

바닥 평수 8평짜리 가게로는 당연히 감당이 안 되는 물건들이 들어왔다.

나는 바로 창고를 찾아 나섰고 다행히 분당은 시골 땅들을 밀어내고 새로 지어진 신도시여서 도시 밖으로 조금만 더 나가면 아직 개발의 빛을 보지 못한 오래된 주택과 창고들이 즐비했다. 

나는 보증금 500에 50만 원 주고 창고 반동을 빌렸다.      

당시에는 크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나는 당시 나도 모르게 꽤 큰 사업의 기반을 다녀나가는 시기였다. 

중간중간에 아이도 낳고 기를 쓰고 젖도 먹여가며 애면 글면 끌어갔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니 그랬다.      


2004년 겨울. 

영국에서 애써서 사모은 내 골동 물건들의 첫 컨테이너가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이때 나는 물류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다.     

애초에 물건을 살 때부터 한국에 골동 장사들에게 대놓고 일을 도와주는 한국인 물류회사의 도움을 받았으면 일이 한결 수월했을 텐데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은지도 생소한 영국인 물류회사한테 일을 맡기려니 일이 꼬이는 모양새가 갈수록 가관이라 두어 달이 지나서 막상 한국에 내 컨테이너가 당도할 때쯤 되어서는 안 된다 모르겠다는 담당자와의 말씨름으로 나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일이 하나하나 난관이고 암초였다. 

세상에 외국에서 물건 한번 수입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저만 믿고 사장님은 물건이나 옳은 것 이쁜 것. 잘 팔릴 것 구매하시는데 신경을 더 쓰세요. 

수입 통관은 제가 다 알아서 해드리겠습니다. 

응당 화주들에게 알랑거릴 한국 가이드들의 호언 장담들이 뒤늦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흥. 한국인 뒤통수는 한국인이 주로 친다던데 나는 영어 말마디나 하는데 내가 외 한국인 거간꾼을 쓰나 고급지고 깔끔하게 영국 회사 상대하지. 하고 거만을 떨었던 나 자신이 구역질 나게 후회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컨테이너는 부산항에 당도하는 날짜가 되었고

그 내부 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역시 걱정했던 대로 

개장검사가 떨어졌다. 

개장검사라는건 화주(물건의 주인)가 새로 수입을 시작하는 경우 잘 걸리는데 (내 경험상 그랬다) 컨테이너 안에 혹시 수입이 금지되거나 패킹 리스트 안에 없는 물건들을 쑤셔 넣지 않았는지. 컨테이너 저 깊숙한 속옷까지 뒤집어서 한번 보겠다는 거였다.


보통 전체 화물 중 1-2 %를 무작위로 골라서 한다는데 

유럽의 앤틱들은 다른 화물들과 다르게 각각의 물건들이 다 이름이 다르고 품목이 장황하다 보니까 단골로 걸리기를 잘하는 수입품이었다      

그래도 이태원 등지의 경력이 오래된 상인들은 오랫동안 수입해먹는 내내도 한번 걸리지도 않고 잘도 빠져나가던데 나는 되는대로 인사도 하고 식사하시라고 나름 비용도 지불했는데 가다가 꼭 한 번씩 걸리는 것이 매번 참 억울했다.      

첫 번째 수입 때도 역시나 개장검사에 걸렸는데 당시 내 일을 봐주고 있던 부산의 어느 물류회사 사람이 컨테이너 딴다는 시간에 맞춰서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 뚜껑 열고 물건들을 거의 내동댕이 치듯이 바닥에 부려놓아서 책상은 다리가 부러지고 의자들도 나동그래지고 여하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더라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당장 내려가고 싶었지만 물건이야 지가 올라와야지 내가 승용차 끌고 부산까지 내려간들 주머니에 달랑 집어넣고 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저 어서 어여 수습해서 서울 쪽으로 물건들을 올려달라고 사정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당장도 아니고 이틀인가 후에 주섬주섬 챙겨서 2.5톤 트럭 두 대에 나뉘어 실려서 성남 어느 야적장까지 당도한 내 물건들을 보고 나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먼 나라에서 나랑 인연이 되어서 그야말로 먼먼 길을 배 타고 동동 달려온 아이들인데 처참한 몰골로 구리구리한 창고 바닥에 얼키 설키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억울하고 답답하고 다시는 이렇게 엉성하게 수입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그 뒤로 수입 횟수가 반복되면서 물건을 어떻게 패킹하고 요청하고 어떻게 수입하고 미리미리 손써서 개장검사에 걸리더라고 너무 야박하게 도리지 당하지 않도록 단속해 놓는 지혜도 생겼다.

무엇보다 서류를 어떤 순서로 보기 좋게 작성해야 검사에 걸리지 않는 노하우까지 알게 되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같은 물건도 보다 정확한 내용으로 정보를 전달하면 통관 담당 직원도 그 정보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애매하고 의심쩍게 적어 넣으면 오히려 걸릴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내 첫 수입 딜러 초년 시절은 경험과 학습으로 단단해져 갔다.     


(앤틱을 누가 살까 08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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