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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인 Nov 01. 2015

아프고 애잔한 케익

아빠의 케익이라고 쓰고 아...슬프다..라고 읽는다.

엄마 생신이었다. 

우리 엄마는 올해 79세.

내나이가 42니까 엄마는 정확히 37에 나를 낳았다.     

나도 36에 막내를 낳았다. 

키우기 힘들게 왜 그렇게 늦은 나이에 나를 낳았을까.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동네 엄마들보다 눈에 띄게 늙수그레한 엄마를 보며

가끔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 막내도 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할까.    


여튼 엄마 생신이었고 삼남매가 모였다. 

오빠 둘에 나하나.    

적당한 숫자이고 그 시절 대한민국의 평균쯤되는 사람들

왁자지껄 먹고 마시고 엄마의 생신을 축하했다.    

 

한참 썰고 지지고 볶고 먹고 배부르네 잘사네 살쪘네 빠졌네

이뻐졌네 어쨌네 어쩌고 저쩌고 와글와글하던 중에    

아빠가 슬그머니 일어나신다. 

참고로 아빠는 올해 80. 딱 좋은 나이다.    


그러더니 상위에 케익 접시를 집어드시고 부엌으로 총총 사라지신다

왜 그러시나 했더니 다시 나와서 이번엔 한참 집어 먹고 있던 포도 접시를 들고 사라지신다. 

왜 그래요? 애들 한참 먹고 있는데? 엄마의 볼멘소리가 이어지고 우리도 어리둥절해서 아빠만 쳐다봤는데 아빠는 별 말 없이 그냥 부엌으로 들어가서 뭘 하시는지 나오질 않으신다.     

깔끔한 아빠 성격에 고명이 얹어진 맛난 부분만 쥐처럼 파먹고 맛없는 부분만 고스란이 남겨진 난자당한 케익과 먹다 남긴 어수선한 과일 접시가 보기 흉해서 얼른 치운다고 저러시나...싶었다. 

으이그..또 저런다..엄마의 아빠 흉은 언제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만 내가 보기에도 아빠의 지나친 깔끔함은 날이 갈수록 피곤했다.    

 

여튼 또다시 왁자지껄 냠냠 짭짭. 

시간은 잘도 흘러 각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열댓명이 모였으니 신발짝만해도 몇 개인가. 

신방장 앞에 우굴우굴 모여서 이번에는 자기 신발 찾는다고 다시 한바탕 난리법석이었다.


그 북새통 와중에 아빠가 무슨 검정 비니루를 봉지봉지 묶어 쥐고 슬그머니 며느리들과 딸을 찾으신다.     

이게 뭐에요? 하나씩 가져가라. 과일이다 과일. 

과일 집에도 많은데 엄마 아빠나 드세요

정신없는 손에 아빠가 꾸역꾸역 쥐어준 봉지가 거추장스러워서 얼른 내려놓고 싶었지만 엄마 아빠가 생각해서 골고루 넣어주셨을 것을 생각해서 알량한 효도 비슷한 마음에 그냥 들고 내려왔다.     


집에와서 애들 저녁을 챙기며 아빠가 들려주신 비닐을 풀었다.

세상에...이게 뭐야..    


사과니 배니 요즘은 흔하디 흔해서 지나가는 길에 누가 가방에 넣어 준다해도 무겁게 뭘...그런걸...하며 별로 반길 것 같지 않은 과일들이 알알이 쏟아져 나왔고. 

그리고 한구석에 빠리바케트 마크도 선명한 빵 포장지에 아까 먹다 남은 케익이 뭉개진채로 한조각 들어 있는 것이 아니가.    


다른 빵이 들어 있던 빵 포장지를 그 빵 다 드시고 휴지로 닦으셨던지 물로 행구셨던지 재주껏 알뜰히 보관해두셨다가 먹다 남은 케익을 정확히 삼등분, 그봉지에 재포장. 앞앞이 하나씩.

아...아빠가 얼마나 뿌듯하셨을까..    


그런데 이건 좀 심했다. 

처음 그 봉지에 들어갈 때부터 모양이 심하게 뭉개져 있었겠지만 과일봉지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한참을 굴러다닌 케익비니루는 그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왜 쓰레기를 담아갖고 다니나...할 정도로 처참한 모양새였다.     

다 터져서 여기저기 묻지 않을게 다행이었고 그래서 케익을 담아 주신게 고마운게 아니라 세상에 이토록 꽁꽁 묶다니...할 정도로 심하게 동여매주신게 고마웠다.     


그 옆에는 아까 집어먹다 아빠한테 접시째 뺏긴 포도.

그 역시 큰 거송 한송이를 정확히 삼등분. 한집마다 미니송이 하나씩.

이것도 역시 사과와 배의 단단한 공격에 속절없이 후비적후비적 뭉개져 있었다.     


아...아빠...

확 짜증이 밀려왔다. 

요새 이렇게 주신걸 누가 먹는다고..

그것도 뒷 베란다에 멀쩡한 과일들도 있더구만 먹던 걸 이렇게 싸주시면 어떻해!!!

머릿속 비명이 입 밖으로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음식물처리를 시작해야한다는 귀찮음에 눈이 멀었는지 옆에 바리바리 싸주신 ‘뒷베란다 멀쩡한 과일들’도 눈에 안보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케익 비닐을 뜯고 살만 찌고 맛도 없는 크림 걷어 내고 빵부분을 파내서 몇젖가락 퍼먹고 고스란히 음식물 쓰레기통에 털어 버렸다. 

비닐까지 확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고 크림만 살살 떼서 버리고 비닐은 손에 크림 묻을까 덜덜 떨며 (그런게 묻는 건 왜 그렇게 싫을까?) 조심스레 접어서 재활용 비닐에 겹쳐서 버린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마음 속 한구석이 뜨거운 물 한줄기가 흐르는것처럼 찌르르..하다

그 크림을 다 걷어 먹었어야 했는데...식의 적극적 효심이나 회개같은 것은 아니지만 

먹다 남은 케익을 쳐다보는 나와 아빠의 마음의 눈의 차이가 너무 가슴이 아팠다.     


아빠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셨다.

6.25 전쟁때 친 할아버지가 행방불명 되셨고

당시 열 댓살의 청소년이었던 아빠는 집안에 장남이라는 이유로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고생 고생 고생바가지를 하면서 사셨다했다.   

 

그 시절 분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동기간들이랑 특별한 추억이나 정이 있다기 보다 배 곯는 동생들을 차마 바라 보기 어려워했던 그 절절하고 불쌍한 심정만 가슴에 가득히 남아서 지금도 고모 삼촌들. 그리고 돌아가신 친할머니 얘기를 하시면 그렇게 자주 우신다.     


다 떠나서

‘케익’ 이다.     


생일상에 올려진 진진한 음식들이 고스란이 남아 도는걸 보시면서 

아빠는 저 중에 일부는 버려질텐데...저거 안 먹고 가면 결국 버릴텐데...걱정을 하셨나보다. 

그 중에서도 기름진 케익. 그걸 그냥 버리는게 너무 아까우셨나보다.     


저 맛있는걸 다 먹지도 않고 버릴 작정으로 앉아서 저렇게도 무신경하게들 떠들고 놀구만 있구나. 아마 멀리서 우리들 노는것을 아니꼬운 눈으로 째려보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런 아빠가 어쩐지 좀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한테는 그냥 기름 덩어리 케익.

어릴 때 조차도 그게 그렇게 뭐 대단한 음식이 아니었던 그냥 제과점 케익.    

아빠한테는 한때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이 귀한 음식이었던 케익.

시장 바닥을 누비며 채소장사가 흘리고 간 배추 이파리를 모아다가 끓여먹으며 이를 악물고 견디어 내셨다는 춥고 배고팠던 전쟁시절. 그 아픔이 DNA처럼 뇌리에 남아 있는 아빠의 케익.    


상 위에 아무게나 널부러져 있는 케익 한접시를 바라보는 두 눈길에

이렇게 엄청나게 다른 세상들이 겹쳐져 있다.     


왜 인지 모르지만 아프고 애잔하다. 

그냥 아빠가 애잔하고 안쓰럽다. 그래서  자주자주 찌르르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전쟁통에 아빠를 만나 정말 맛있고 따듯한 밥을 먹여드리고 싶다.

지금 내 아들들에게 따듯하고 맛난 음식을 먹이듯이 그 어린 소년에게 세상 제일 맛있는 밥을 차려주고 싶다.     

아프고 애잔한 케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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