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이네."
4,500이나 3천만이나
숫자의 크기는 체감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이미 내 이름과 주소는
지구를 두 바퀴 반은 돌았을 텐데.
세계의 공공재가
이번에 최신 업데이트 된 것일 뿐.
나는 이런 건조한 생각으로
남 일 같은 개인정보 유출 뉴스를 본다.
그런데 "글로벌 기업"의 대처방법은
남 일을 내 일로 만들어줬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여간해서 놀랄 일도 별로 없는
중년 여성의 심장에
불 화살 하나를 쏘아 올렸다.
폭풍처럼 앱을 열어
탈퇴 버튼을 찾으려는데
"...... 어디 있니?"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탈퇴 버튼 누르기'
15일의 퀘스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미 자동 로그인으로 쓰던 앱이
낯설게도 나에게 비밀번호 재입력을 요구했다.
이런 무례한 것 같으니!
내 정보를 내 허락도 없이
지구 두 바퀴 반짜리 여행을 보내놓고선
정작 나에게는 비밀번호를 요구한다고?
하지만 이 언짢은 기분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비밀번호 인증 후에도
만날 수 없는 '탈퇴 버튼'씨를 향한 그리움이
곧 그 언짢음을 밀어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과 생활의 틈 사이로
퀘스트 2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기결제 멤버십이
땅속에서 튀어나온 손처럼
내 발목을 잡아챘다.
"환불 필요 없다.
버튼씨를 내놓아라!"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도
없던 능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리고
모바일 앱에서
버튼씨가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C버전에만 존재하는
유령이라니.
한방 맞았다.
그렇다고
내 탓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억울했다.
다크패턴
네 녀석이
이 흑막의 주인이로군.
하지만
통화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고객센터는
사막에서 만난 신기루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열쇠였다.
결국
멤버십 정기결제를 종료하고
날짜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내 머릿속의 지우개와의 타임어택이 시작됐다.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이번 퀘스트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이용자의 불편과 불쾌감을
레버리지로 쓰나 보다.
말로만 듣던 '배수의 진'이
이것이구나.
결국
나에게 적대적인
내 기억력과의 싸움은
10일짜리 퀘스트를
15일로 늘려 놓았다.
바야흐로 마주한 버튼씨는
왼쪽 메뉴창 가장 아래에
무력한 모습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용의 동굴 앞에서
이미 죽어 있는
용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커서로
버튼씨를 쿡 찔렀다.
그러자 갑자기 창이 하나 떴다.
[지금 탈퇴하시면
이러쿵저러쿵한 혜택이 모두 사라집니다.
이래도 나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