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진한 한 여름에는 진초록의 덩어리로 보였던 출근길 가로수들은 옅은 볕으로 단풍을 빨갛게 익히는 가을이 되면 진한 노란색을 뽐내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가로수로 사랑받는 은행나무는 그래도 출퇴근길 곁눈으로나마 구경하는데, 산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물속성인 나는 빨간 단풍을 본 지가 몇 년 된 것 같다. 지난봄 그 예쁜 벚꽃도 차 창으로만 구경했는데 여름 지나 가을이 되어도 차창으로만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다니……
날이 갈수록 노랑 잎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며 올해에도 아직 꺼내 입지 못한 트렌치코트가 기억에 스치운다. 점점 짧아지는 봄과 가을이 지구가 보내는 화려한 기후 위기의 경고임에도 ‘작년에도 못 꺼낸 트렌치코트가 아직 세탁소 비닐 안에 있구나.’가 먼저 떠오른 것은 내가 기후위기에 아직 민감하지 않아서일까?
같은 책을 두 번째 읽을 때에도 처음과 감상이 다르다. 어쩌면 매년 돌아오는 가을이지만 계절이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성장하거나 때로는 뒷걸음으로 걷기도 한 내게 매년 가을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매년 뉴스에서 ‘봄꽃이 늦게 피고 빨리 지고 있다, 단풍이 보이는 시기가 짧아지고 있다.’고 알려주기도 하지만 문득 출퇴근길에 느껴지는 봄과 가을은 확실히 짧아지고 있다. 혹시 십여 년 전에는 어릴 땐 사진 찍고 맛있는 것 먹으러 가을을 쫓아다닐 때는 경험으로 진하게 남겼던 가을이 지금은 계절도 모르고 바쁘게 사느라 가을이 옆에 와 서성이다 떠나도 모르는 게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간다는 말이 맞는 것이라면 계절도 빨리 도는 것이 맞으니까. 그도 그럴듯하다.
진한 초록과 흰 눈 사이 잠깐 보이는 노랑과 빨강은 배부른 색이기도 하다. 여름은 크는 계절이고 가을은 열매가 나는 계절이다. 가을의 색과 떨어진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에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낸 밥상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가을은 확실히 배부른 계절이다. 하지만 가을을 맞은 나무들이 잎의 색을 바꾸는 것은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한 월동준비인 셈이고 이 월동준비가 얼마나 '완벽한 빨강'으로 나타나는지는 곧 그해 기후의 불안정성을 반영한다. 우리는 매년 '가을의 절정'을 이야기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쨍한 색이 사실은 나무가 비정상적인 기온 변화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마치 극한의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처럼, 온화한 중간 계절이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 사이를 급하게 오가는 지구의 열병이 바로 우리가 환호하는 이 '병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짧은 생의 한시성은 짧은 아름다움에 아련함을 준다. 짧은 단풍의 시기도 그렇다. 단풍 절정기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숙박, 요식업, 교통, 기념품 등의 광범위한 항목으로 지갑을 열게 한다. 우리의 4계절은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1년 농사 같은 것이다. 여름 한 철 여는 해수욕장만큼은 아니지만 가을색으로 불타는 내장산과 같은 명소는 약 2주간의 절정 기간 동안 주변 상권 매출이 평소에 비해 235% 폭증한다고 하니 말이다. 2주로 압축된 이 파급력은 수익성이 높지만, 단풍 시기가 예측 불가능해지거나 더욱 짧아질 경우 관광 산업 전체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새삼 단풍의 가치를 단지 찰나의 관광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상업적 활용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함을 일깨운다. 내 눈에 예뻐 보이는 모든 것은 모두 경제가치가 있다. 미처 내가 모를 뿐. 관상용 단풍나무 품종을 개발하고 묘목을 사고파는 임업 경제, 캐나다의 메이플 시럽처럼 단풍나무를 활용한 특산물을 개발하는 1차 산업 경제 역시 가을이 주는 1년 농사 중 하나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은행과 단풍은 엽록소를 벗어내며 물기를 간직한 싱그러운 색으로 예쁠 테지만, 불과 며칠 사이 바짝 말라 주먹 쥔 단풍이 되어 있을 것이다. AI 시대를 사는 우리도 별 수 없이 자연이 베푸는 생산력과 순환의 힘에 기대어 살고 있음을 깨달으며, 이 작은 낙엽 앞에서 새삼 겸손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
자연이 주는 가치는 눈을 즐겁게 하고, 의외의 경제성을 보여주는 것 외에도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자연은 그 스스로 완벽한 생태계 순환의 일부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산의 풍요로운 흙과 바닷가 모래의 척박함이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모래사장은 이 순환의 핵심인 낙엽의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낙엽을 떨어뜨려 줄 나무가 살지 못한다. 짠 바닷물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곧 낙엽이라는 생태계 순환의 핵심 동력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껏 지구에 등장했다 사라진 모든 종을 통틀어 가장 자연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며 사는 인간도 이 생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과는 달리 완벽한 생태계의 일부로 사는 나무들이 남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낙엽이다. 매년 성실하게 광합성을 위해 만든 잎은 때가 되면 붉고 노랗게 산화하여 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떨어진 낙엽은 겨울을 나는 곤충과 미생물 등에게 혹독한 겨울을 견딜 수 있는 '월동 이불' 같은 역할을 하다가, 시간이 오래 지나면 섭리대로 부엽토를 형성해서 토양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천연 비료' 역할을 한다. 이 순환의 고리야말로 단풍이 지닌 가장 근원적인 생태적 가치이며, 생태학적 가치는 아름다움이나 경제적 효율성을 떠나,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구 환경의 건강 상태와 순환을 보여주는 최종적인 바로미터가 된다.
단풍은 우리에게 짧지만 강렬한 미학(예술)을 선사하고, 2주 만에 수백 퍼센트의 매출을 일으키는 고농축 된 경제적 파급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낙엽이라는 가장 겸손한 형태로 돌아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생태계 순환의 핵심 동력이다. 단풍이 지닌 이 세 가지 가치는 결국 '점점 짧아지는 가을'이라는 하나의 근원적 질문으로 통합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젠 단풍에 대한 감상이 '작년에 못 꺼내 입은 트렌치코트'보다 ‘지구의 열꽃’으로 떠오를 것 같다. 과학자들이 경고하는 단풍의 '병적인 아름다움'을, 온화한 중간 계절을 잃어버리고 여름과 겨울 사이를 급하게 오가는 지구의 열병이자 경고로 인식하면서……
찰나의 미학은 찰나로 끝나서는 안 된다. 단풍이 주는 아름다움, 경제적 가치, 생태적 중요성을 일깨움으로 승화시켜야 할 때이다. 의외로 사계절을 모두 가진 나라는 별로 없다고 한다. 있을 때 잘하자. 먼 훗날 예쁘게 책장에 넣어둔 낙엽 한 장이 박물관에 기증되는 일이 없도록.
오늘도 퇴근길에 달리는 차 옆으로 보이는 은행잎은 맑은 노랑물감처럼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