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고 파일럿 Sep 05. 2020

LAS 공항을 가야했던 두 가지 이유

LAS, McCarran international airport


같이 교관 공부를 했던 SH 형에게 전화가 왔다.

“망고야, 일요일에 안 바쁘지?”
“네, 그럼요 형”
“나 여자 친구가 2박 3일 베가스 스케줄이 나왔는데, 비행기로 좀 데려다줄 수 있나?”
“솔로가 서러워서 비행이 안 될 것 같아요.”
“도착하면 공항 밖에서 맛있는 밥 사줄게”
“루트 짜 올게요. 일요일날 봬요”
 
맛있는 밥을 사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느 공항에 내려주는 게 좋을까. 라스베가스 공역 차트를 펼쳐보니 세 개의 공항이 보인다. 그중 Henderson 공항과 North Las vegas 공항은 베가스 야경을 보고 싶어서 여러 번 가본 공항이었다. 그 두 공항을 가보며 하나 아쉬웠던 건, 두 공항 모두 베가스 귀퉁이에 있어서 베가스 중심 시내로 낮게 날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왼쪽에 보이는 McCarran 공항와 오른쪽에 보이는 Vegas 시내


그렇게 베가스 중심부로 들어가려면 세 개 중 하나 남은 그 베가스 중앙에 있는 공항에 가야 했다. 시내랑도 제일 가까우니 형을 내려주기에도 딱 좋은 공항이었다. 다만, 그 중간에 있는 공항이 McCarran Las Vegas 국제공항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 이쯤 되니 못 갈 이유도 없었다. LAX도 다녀와봤는데, LAS가 뭐 대수랴. 그리고 무엇보다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7개월 전, 라스베가스 야경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무작정 비행을 나왔었다. 그 시간에 날아다니는 비행기는 32,000피트 위에서 날아다니는 여객기들 뿐이었고 7,500피트에서 날아다니는 비행기는 나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낮은 고도에서의 실시간 기상상황은 보고 될 일이 없었고 나는 그저 평소처럼 안전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날고 있었다.
 
도착 공항까지 30마일 정도 남았을까, 앞에 큰 구름 하나가 보인다. 피해 가려고 선회를 하는데 바람소리가 유난히 크다. 유쾌하지만은 않은 상황인 것 같아 도착 공항의 기상방송을 듣는데 42노트의 돌풍 경보가 있다는 말이 들린다. 저 정도의 바람이면 랜딩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어 돌아가려는데, 그 순간. 비행기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때 받았던 느낌 그대로 표현하자면 왼쪽 날개가 찢겨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고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고도, 헤딩, 속도 뭐 하나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말도 안 되는 강하율로 비행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우선 기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속도를 줄이고 수평으로 만들어 조종을 최소화했다. 7,500피트에서 6,200피트까지 내려가는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땅에 박힐 때까지 남은 고도가 있었다. 다행히 조금 지나고 나서 미친 듯이 떨어지는 건 멈추고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한 상태로 돌아왔다. 내 상황을 알리기 위해 교신을 잡았다.
 
“Vegas approach, 극심한 터뷸런스에 고도, 헤딩, 속도 조절 불가능 상태입니다. 수정된 루트, 보고된 기상상황 요청합니다.”

5시간 같이 느껴지던 5초가 지났을까, 다급해 죽겠는데 대답이 없던 관제사의 말이 들린다.

“누구세요?”

응…?

아니, 세상에 누구세요라니.
 


 





날아오는 동안 고도, 항공교통 같은 내용을 서로 쭉 교신해왔는데 누구세요라니. 갑자기 모르는 척하는 관제사에게 서러워지려는 찰나 오디오 수신 불빛이 반짝인다.
 
“여긴 McCarran 공항 지상 관제탑입니다. 방금 터뷸런스 속에 있다고 보고한 비행기 누구죠?”
 
이게 무슨 소린가. 나는 지금 McCarran 공항 지상 관제탑이 아니라 하늘을 담당하는 관제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니 일단 그것보다 고도를 보니 또 어느새 500피트를 넘게 잃고 있었다.
 
“Cessna XXX, 극심한 터뷸런스를 만나서 하강 중입니다.”
“여기 주파수는 121.9입니다. 125.9로 연결해서 상황 보고 하시면 됩니다.”
 
기내에 있는 교신 송신장치를 보니 125.9로 설정되어있어야 할 주파수가 121.9로 설정되어있다. 아까 터뷸런스 속에서 기체가 심하게 흔들릴 때 손을 퍼덕퍼덕하며 버튼을 건드렸던 것 같다. 부끄러움이

올라올 시간도 없이 관제사에게 미안하다 이야기를 하고, 다시 원래의 주파수로 돌아가 상황보고를 했다. 새로운 루트를 받고, 새로운 고도를 받고, 원래 가려던 공항이 아닌 다른 공항으로 변경했다.
 
10분 정도 우회해서 돌아갔을까,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터뷸런스도, 바람도 없었다. 대기도 한결 편안해졌다. 조금 지친 몸과 혹시 어딘가에서 터뷸런스를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금 겁이 난 것 빼고는 출발할 때처럼 여유롭다. 상황이 여유로워지니 생각이 많아진다.
 
국제공항 주파수로 생뚱맞게 어느 이상한 세스나가 와서 나 죽겠다고 살려달라 꽥꽥댔으니, 거기에서 평화롭게 택시 하던 다른 보잉이나 에어버스 같은  큰 여객기들은 얼마나 웃겼을까.

아니다, 어쩌면 나를 걱정했을 수도 있겠다.
아니다 아니다, 분명히 웃겼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시속 3km짜리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너무 빨라서 무섭다고 꽥꽥대면 귀엽고 웃기지 않은가.
 
생각이 이쯤 되니 부끄러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어찌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시 돌아가서, 나 안전하게 잘 날아다니고 있으니 여러분 걱정 말고 굿나잇!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언젠간 McCarran 공항으로 직접 와서 지상 관제탑과 제대로 교신을 해서 이 부끄러움을 꼭 없애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비행하는 사람은 무서운 게 있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7개월이 지난 지금 그때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형의 건강한 연애를 위해서라도, 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비행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LAX를 갈 때와 마찬가지로 공항에 전화를 해서 바쁘지 않은 시간을 물어보고 평소보다 조금 더 꼼꼼하게 비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다시 온 것을 환영해주는 듯, 베가스 상공은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날씨가 평화로웠다. 터뷸런스를 만났던 그곳에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비행기에게 부드럽게 길을 내어주었다. 이제 남은 숙제는 하나다. McCarran 관제사와의 매끄럽고 제대로 된 교신. 하늘 관제사로부터 지상 관제사에게로 주파수를 넘겨받고 해당 주파수로 바꿨다. 125.9에서 121.9로. 마음이 조금 떨린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전 생기는 작은 떨림들. 호흡을 길게 삼키고 마이크를 눌렀다.
 
“Vegas Tower, Good evening, Cessna XXX with you at 5,000”
“Cessna XXX, 반가워요! Runway 8R 예상하세요. 그런데 혹시, 예전에 터뷸런스 때문에 교신 주었던 분 아닙니까?”
“맞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목소리 듣고 알았습니다. 그때 걱정 많이 했었습니다.”
“덕분에 잘 돌아왔습니다.”
“천만에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훈훈한 이야기는 당연히 없었다.

7일 전에 먹은 점심도 기억이 안 나는데, 하루에도 수백 대가 다녀가는 공항에서 7개월 전의 세스나를 기억할 리가 없었다. 관제사는 늘 그렇듯 덤덤하게 나에게 랜딩 지시를 주었다.
 
“Cessna XXX, Las vegas Tower, Runway 8R cleared to land, wind 170 at 10”

계기비행으로 갔는데 날씨가 좋았던 탓인지, 시계접근으로 바꿔주었다. 간단히 말하면 항공기 안의 기계들만 보며 비행하는 것을 멈추고, 밖을 보며 비행하라는 지시이다. 관제사의 말을 듣고 계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다양한 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베가스 시내가 보인다. 오두방정 빛나는 불빛들과 세상에서 가장 밝은 불빛이라는 LUXOR 호텔의 불빛도 그 사이에 우뚝 솟아있다. 알록달록 어느 하나 겹치지 않은 색의 도시는 내가 바로 베가스야!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했다. 공항의 모습은 더 근사했다. 굴지의 관광지라는 이 공항의 불빛들은 다른 공항보다 유난히 더 화려한 듯했다. 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비행을 할 때 불빛이 아름다운 곳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겐 선물 같은 공항이었다.
 

McCarrac 국제 공항


공항에 착륙하고 택시 지시를 받아 FBO로 가니, ‘FOLLOW ME’라는 큰 전광판을 달아 놓은 트럭이 내 앞에서 얼쩡거린다. 베가스처럼 반짝거리는 저 전광판을 보니 따라가지 않으면 왠지 안 될 것 같아서 따라갔더니 주기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안내해준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넘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지쳐 보이는 기색 없이 걸어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과 온통 강하고 화려한 색으로 포인트를 주고 있는 거리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건물 사이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소란하게 흔들리는 야자나무 아래, 음식점 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에 나는 걸음을 더디게 주었다.
 
헤드셋 때문에 눌린 머리카락과 긴장한 탓에 한껏 초췌해진 얼굴, 딱히 신경 쓰지 않은 옷차림으로 거리를 베가스 시내를 걸어 다니니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 막바지가 되면 늘 그렇듯, 그동안의 여행을 정리하며 내가 가진 넉넉한 시간들을 그저 걸어 다니며 보내도 즐거웠다. 특히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있으면 딱히 할 일이 없는 일상에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다녀와보는 일도 좋았다. 이른 새벽의 여명과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불빛이 공존하는 시간에서 내가 본 풍경은 노을 지는 밤의 시간과 겹치지 않았다.
 
여자 친구랑 가려고 아껴둔 펍이 있다는 형의 이야기를 듣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야외와 실내 중 어디에 앉겠냐는 종업원의 말에 둘 다 망설임 없이 야외에 앉겠다 말했다. 이 정도의 바람과 분위기를 실내에만 앉아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피자 한 판과 랍스터&맥 앤 치즈를 시켰다. 랍스터&맥 앤 치즈를 시키니 종업원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라며 좋은 선택이라는 말까지 해주니 한껏 기대감이 부풀어 올라온다. 사실 이쯤 되니, 편의점 피자를 갖고 와서 먹어도 맛있을 것 같고, 발 냄새 정도의 고약한 냄새가 나는 치즈라도 상관없었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비행이었고, 무엇보다 더 이상 베가스에 대한 트라우마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언제 없어진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분명 공항에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두근거리는 마음이 있었고, 이어서 랜딩까지, 그리고 택시 해서 주기장까지 올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 같다. 긴장에서 없어진 줄도 모르는 그 사이에.
 
형과 재미없게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랍스터&맥 앤 치즈’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칸초 크기의 랍스터가 두 조각 올라와있다. ‘랍스터 느낌이 첨가된 맥앤치즈 (ft. 랍스터 향)’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한 조각이 아닌 게 어디야 싶어 한가득 입에 넣었다.
 
내 앞에서 연신 여자 친구 자랑을 해대는 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끈질긴 구애 끝에 얻은 사람과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랑 이야기, 그리고 요청하지도 않은 여자 친구의 사진까지, 여자 친구에 대해서 말을 할 때마다 배시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신났네.
그만 좀 하라고, 세상에서 형 여자 친구가 제일 예쁜 거 이제 알겠으니까 다른 이야기 하자며 모질게 넘어가려고 해도 이 팔불출 형 만만치가 않다. 맨날 자기는 속물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런 순수함이 남아 있으니 형으로서 제법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
 
맥주를 마시면 흥이 넘쳐버릴까 두려워, 시원한 맥주 대신 달콤한 콜라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무엇보다 맥주를 한잔이라도 마시게 되면 돌아가는 비행을 못하게 되니 다음에는 언젠가 좀 더 여유로운 상황에서 같은 메뉴로 느긋하게 한잔해야겠다며 생각을 삼켰다. 그리고 그때는 이왕이면, 내 여자 친구 자랑을 받아대는 상황으로.






베가스 공항에 주기되어 있는 비행기들


밥을 먹고 시내를 조금 구경하다 공항으로 돌아왔다. 항공기 상태를 간단히 확인한 뒤 관제사에게 택시 준비 완료됐다고 보고를 하는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Cessna XXX, 지금 비상상황 통제 중입니다. 10분 후에 다시 교신 주세요.”

이 밤에 무슨 비상상황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 공항에 랜딩 하는 비행기에게 생긴 비상상황이면 사람들이 많이 탄 여객기일 텐데 혹시 심각한 일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이 들어 마이크를 멈추고 들려오는 교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관제사가 말한 10분은 이미 지났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건 비상상황에 처한 비행기와 관제사 둘의 목소리뿐이었다. 다른 모든 항공기는 대기상태, 적막한 라디오가 결코 반갑지가 않다. 내용을 들어보니 엔진이나 기체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승무원에게 일어난 의료문제로 인한 비상상황이었다. 시차, 생활, 식사 어느 하나 규칙적이지 못 한 채 몇 시간 동안 하늘 위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니 몸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눈 앞에서 응급차를 포함한 각종 지원 차량들이 분주하다. 큰 공항이라 다행히도 대처가 능숙하게 이루어졌고, 관제사가 말한 10분을 훨씬 지난 30분쯤이 되어서야 상황이 조금 진정되어 갔다. 목소리가 다급했던 관제사도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들을 차례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 또한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American XXX, taxi to Runway 1L via D”
“Korean air XXX, follow that heavy”
“United XXX, taxi northbound on Z, hold short of Runway 19 at S”
“Jetblue XXX, B, C6 then C and ramp”

관제사는 순서대로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들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하나하나 차례대로 이름을 불러가며 차분하게 실수 없이 지시를 내리고 있었고,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 교신을 들어보면 응급상황도 끝난 것 같은데 나를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관제사 아저씨가 나를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Departure 비행기들 프로그램 입력하느라 잠깐 바쁜 것뿐이다. 조금 더 기다려봤다


10분이 지났다
…… 관제사 아저씨가 여전히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 분명히 타워에서도 잘 보이는 위치에 있는 FBO 가장 앞에서 불 켜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바쁜 탓일까, 그러기엔 교신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이 많지가 않은데. 아니다 또 나름의 할 일이 있겠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15분이 지났다
관제사 이놈이… 아니 아니 관제사 아저씨가 여전히 바쁜가 보다. 시간은 늦어져가고 있고 새벽에는 천둥번개 경보가 떴는데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 내 존재를 잊어버린 것 아닐까? 안 되겠다 싶어 마이크를 잡았다.
 


“Vegas Tower, Cessna XXX, radio check”

대답이 없다. 라디오가 고장 난 것일까? 일단 혹시 몰라 불빛을 반짝거려보기로 했다. 딸깍딸깍 불빛을 반짝거리는데 하필이면 Taxi light이 고장 났다. 나머지 불빛 하나로 짝눈으로 반짝거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불빛보다 공항에 설치된 불빛이 더 강한 것 같다. 큰 공항이라 저 정도 불빛 밝기가 아니면 큰 비행기들한테 안보일 터이니. 그래도 열심히 불빛으로 비행기 눈을 껌뻑이는데 반가운 관제사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그.. Atlantic FBO에 있는 그 세스나, Runway 8L, taxi via H”
 
응?
일단 Atlantic FBO에 있는 세스나는 나밖에 없고, 지시를 보니 아무리 봐도 딱 나인데, 남들 다 이름으로 불러주는데 왜 나만 ‘그 세스나’ 인가. 일단 지시는 받았으니 한껏 삐친 채로 빠른 속도로 택시 하는데 목소리가 이어진다
 
“Taxiway H에 있는 Cessna, full callsign이 뭐죠?”
“Cessna XXXXX입니다”
“알겠습니다. 요청사항 플랜에 넣었으니 Runway 8L 앞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다시 부르겠습니다”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이름을 불러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왜 그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도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각설하고, 지시대로 8L에서 대기하는데, 누가 국제공항 아니랄까 봐 꽤 짧은 간격으로 비행기들이 랜딩하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이륙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Cessna XXX, Runway 8L, cleared for Takeoff wind 150 at 11”
 
유난히 넓어 보이는 활주로로 들어가서 출력을 올리고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륙하는 속도까지 가속된 것을 확인하고 부드럽게 요크를 당겼다. 바퀴가 떨어지자마자 속도가 더욱 증가하는 것이 느껴진다. 바퀴와 지면이 닿는 저항이 없어지니 속도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어쩔 때는 하늘에 날아오르자마자 신이 난 비행기가 아이처럼 뛰어가는 느낌인 것 같기도 한다. 날아다니는 애가 땅에 있을 때보다 하늘에 있을 때를 더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Departure procedure를 실수 없이 끝내고 다시 원래의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Vegas Tower의 마지막 교신이 들린다
 
“Cessna XXX, Contact Vegas approach 125.9, you have a great evening”
“125.9, have a good night”
 
마무리까지 실수 없이 끝내고 돌아오는 길. 더 이상 교신에 대한 트라우마도, 터뷸런스에 대한 무서움도 없다. 고아가 될뻔해서 잠깐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길 뻔했지만, 결국은 이름을 불러주었으니 괜찮다. 누군가, 비행할 때 언제 가장 재미있었냐고 물었을 때, 늘 세 번의 비행을 떠올렸었다. 그리고 이제는 베가스까지, 유난히 기억에 남는 비행이 늘어난다. 다행히도.

매거진의 이전글 비행기의 그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