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에게 캐리어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총과 같다.
라고 쓰고 보니 좀 거창한 것 같아서, 정정하여 이야기하자면
승무원에게 캐리어란, 세상이 필요로 하는 reese's 초콜렛과 같다. 이 땅콩맛 나는 고소하고 달달한 초콜렛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기도, 세상에서 살아남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아 정말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reese's 초콜렛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여하튼,
캐리어 안에는 비행을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물건들이 들어있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없으면 비행을 나갈 수가 없다.
우선, 국제선 비행에서는 승무원 등록증을 출국장에 설치되어있는 어떤 전자기기에 태그 해야만 출국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린다. 국내선 비행은 사원증을 보여주어야만 출발층으로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애초에 신용카드 크기만한 이 작은 물품이 없다면 오늘 내가 타는 비행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못 보고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운항하기 위해서는 조종사 면허증이라든지, 신체검사 증명서, 무선통신사 자격증, CAT II&III 자격증, CRM, 여권 등등 노선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필수로 휴대해야 할 자격증들이 있는데, 이 모든 자격증을 사원증처럼 목에 주렁주렁 걸 수 없으니 캐리어에 보관을 한다. 만약 캐리어 없이도 나는 목에 다 걸겠어! 라는 마음으로 목에 걸어버리면 당신은 그대로 거북목을 얻게 된다.
어디 이러한 자격증 뿐이랴, 목적 공항의 차트나 각종 회사의 매뉴얼이 담긴 아이패드와 개인용 헤드셋, 그리고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으면 직장인은 하루를 버텨낼 수 없으니 텀블러도, 비행기에서 점심 먹고 나면 찝찝하니 치카치카할 양치 도구, 졸음이 올 때 졸음을 버텨낼 후레시 껌, 걸어가다가 갑자기 강아지가 내 넥타이를 너무 탐낸 나머지 내 넥타이를 물어뜯어버릴 수 있으니 여분의 넥타이도, 그리고 견장, 윙 같은 짜잘한 물건들까지.
물론 해외나 국내에서 하루 이상 레이오버라도 하게 되면 또 다른 캐리어에 옷가지들과 세면도구들을 챙겨야 한다.
계절이 다른 나라로 가게 되면 한국에선 입지도 않는 두툼한 패딩까지 챙겨야 하니, 이따금씩 공항에서 3개의 캐리어를 겹겹이 끌고 가는 조종사가 있다면, ‘아, 시차도 다르고 계절도 다른 곳으로 몇 시간씩 날아가야 하는 저분에게 응원을 해드려야겠다.’하고 마음속으로 화이팅 화이팅 화이팅 세 번만 외쳐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아니아니,
아무튼
이렇게 나와 딱 붙어있어야 할 소중한 캐리어인데,
캐리어가 나로부터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새벽 03:57
“놓고 타유, 내가 할 테니까.”
“아휴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간, 미리 요청한 택시 기사님과 만나 플라잇백과 레이오버백을 들고 트렁크 뒤에 서있었다.
여기서 플라잇백이란, 위에서 말한 없어서는 안 될 자격증, 물통, 헤드셋 등이 들어있어서 이 가방이 없으면 비행을 나갈 수 없는 무조건 필요한 가방이고 레이오버 백은 말 그대로 옷가지, 세면도구 등이 들어있는 가방으로 없어도는 되지만 만약 없다면 다음날 비행할 때 꼬질꼬질 냄새 풀풀 나는 상태로 출근하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가방이다.
친절하셨던 택시기사님께서는 차에서 내리신 뒤, 트렁크 쪽으로 오셔서 나에게 편하게 타라고 말씀을 하셨고, 나는 그 배려가 고마워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뒷좌석에 타고 피곤함을 좀 덜어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동안 기사님과 나는 이따금씩 서로 새벽 댓바람부터 고생 많으시다는 훈훈한 덕담을 나누었고, 우리의 여정은 그렇게 차의 온도처럼 따듯하게 김포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김포공항에 도착한 시간, 새벽 04:17
브리핑 시간은 05:00였다.
여유롭게 도착해서, 브리핑 준비를 끝내고 커피라도 한잔 받아와야겠다 생각하고 택시에서 내리는데 트렁크에 두 개가 들어있어야 할 캐리어가 한 개 밖에 없다. 심지어, 없어도 괜찮은 꼬질꼬질해지는 것만 감수하면 될 레이오버 백이 아닌, 없으면 아예 비행기 자체를 운항할 수 없는 플라잇백이 없다.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시곤 기사님께서,
“왜..왜유?”
“선생님 혹시 아까 캐리어 두 개 맞나요!?”
“아까 가방 하나만 실었는데?”
“헉.”
칠흑같이 어두웠던 새벽에, 나의 캐리어들은 시커먼 색깔이었기에 기사님께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시고 하나만 트렁크에 넣으셨던 것이다.
단말마의 고통으로 순간 숨이 잠깐 멎을 뻔하다가
계산을 해보니, 지금 다시 집으로 다녀오면 아슬아슬하게 브리핑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 지금 다시 저희 집으로 가야 해요.”
집으로 가는 길,
브리핑 시간이 아슬아슬했던 것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나의 플라잇백이 도망갔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플라잇백 안에 들어있는 각종 자격증들과 회사 지급 물품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이후에 있을 일은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조상님, 공룡님, 계시다면 이 가여운 영혼에게 응답 부탁드립니다. 어찌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부디 저를 살려주세요. 정말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직업을 이제 막 얻었는데, 이렇게 잃을 순 없습니다. 공룡님, 조상님 제발요.’
정말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조상님과 공룡님을 소환하여 부디 저의 가방이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만 있게 해주달라며 손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빌고 또 빌었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 나의 바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기사님께서도 “아, 거 캐리어가 있어야할터인디…”하며 같이 빌어주셨다.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나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우리의 택시는 내가 사는 단지 앞 코너를 꺽어들어가기 시작했다. 300m만 더 가면 내 캐리어가 있어야 할 자리다.
300m,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고, 내 캐리어도 어두운 색깔이다.
200m, 캐리어가 있을 것만 같은 환상만 보일 뿐 실제로 캐리어가 보이지 않았다.
100m,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는데
“저기 저거 저 시커먼거 저거 아니여?”
도로 한복판에 보이는 내 플라잇백.
아, 녀석. 도망가지 않았구나.
앞으로 정말 아껴주고 아껴줘야겠다.
조상님 공룡님... 오오..
“선생님, 제가 문 열고 바로 낚아챌게요.”
내 플라잇백을 스치듯 세워주신 기사님 덕분에 나는 문을 열어젖히고 거의 한 발은 차에 걸터놓고 한 발과 한 손을 뻗어서 내 가방을 낚아챈 뒤 우리는 그대로 김포공항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약간 제임스 본드 느낌으로 하고 싶었는데, 일단은 넘어가고.
“비행기 늦는거 아니여?”
“괜찮을것 같아요. 5시 전까지만 가면 되니까… 지금.. 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김포공항 도착.
시간, 새벽 04:56
휴………
회사에 오래오래 다닐 수 있다는 안도감과 도망가지 않은 나의 캐리어에 대한 감사함이 한숨으로 뭉쳐져서 나왔다.
정말 다행히 그날은 미스 플라잇 없이 비행은 잘 다녀올 수 있었고 현재 나는 건강하게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지났나,
출근 날 어느 새벽, 그때 나와 캐리어 구출작전을 펼친 기사님과 다시 만났다.
“기사님! 어휴 잘 지내셨어요?”
“아이고 또 만났네. 오늘은 캐리어 몇개여유?”
“두 개입니다!! 제가 싣겠습니다. 타 계십시오!!!”
그렇게 정말 다행히도,
기사님과 나의 추억은 아름답게 남았다고 한다.
조상님 공룡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