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선은 국내선보다 보다 높은 고도에서 날아다니기에 보이는 풍경들이 훨씬 다채롭다. 대류권 계면 위로 날아다니면서 대부분의 기상, 특히 구름들을 깔고 비행을 하다 보면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CAT같이 보이지 않는 난기류 같은 것을 제외하면 순항 고도에서의 기류도 꽤나 안정적이다.
간혹 저 앞에 검은색 비행운 방귀를 뀌면서 날아가는 다른 항공사 비행기를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고작 위아래로 300m 정도밖에 차이가 안나는 상태로 다니는 비행기들을 보면 회사 로고는 당연하고, 비행기 배때지까지 적나라하게 보일 때도 있다. 이따금씩 마주오는 방향의 비행기가 가까우면 랜딩 라이트를 켰다 끄면서 인사를 하기도 한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버스 기사 아저씨들께서 반대 방향에서 오는 다른 버스기사 아저씨와 마주치면 손을 멋있게 촥 들면서 인사하는 그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여서 엇비슷하게 따라 해 본 것이다. 비행기에서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보니 칵핏에서 손을 들어도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랜딩 라이트를 켰다 끄면서 나름의 반가운 표시를 할 때가 있는데, 반대편 비행기에서도 똑같이 랜딩 라이트를 켰다 꺼주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어쨌든, 오랜만에 국제선이 나와서 기분도 좋았고 같이 갔던 기장님 또한 너무나도 좋은 분이셨기에 도란도란 수다도 떨며 행복하게 비행을 마치며 인천국제공항으로 오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저녁 늦게 끝나는 비행이었기에 착륙을 하고 비행기 바퀴가 땅에 딱 닿으니 긴장이 조금 풀리면서 노곤함이 올라왔다. 그래도 이제 곧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에 겨운 찰나, 관제사분의 목소리가 들린다.
"Follow the green to 8E"
말인즉슨, 초록색 불을 따라서 Transfer of control point(관제가 바뀌는 지점)인 8E까지 가라는 말이었다. 근데 여기서 내가 그만 촌티를 내버렸다.
보통 택시웨이 이름은 알파벳이 먼저 나오고 숫자가 나온다.
예컨대, E2, A1, J8, G10 등.
하지만 인천국제공항에서는 관제가 이양되는 지점, 즉, 관제사가 바뀌는 지점을 표시할 땐 순서가 반대이다.
8E, 3T, 6W 등.
얼핏 들으면 헷갈릴 것 같지만, 이게 일상이고 매일 쓰는 개념이다 보면 헷갈릴 이유가 없다.
마치 학창 시절 내 왼쪽에 앉아있는 민수와 오른쪽에 앉아있는 수민이를 헷갈리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방학을 지내고 오면 어떤가.
왼쪽에 있는 놈이 수민인지, 민수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국내 공항들은 비교적 작은 편이기에, 인천공항과 달리 관제가 이양되는 지점을 표시해 놓은 곳이 드물었다.
그래서,
국내선에 익숙해져 버린 무지몽매한 나는 그만 8E와 E8을 헷갈려버렸다.
"Follow the green to E8.. 8E... 아... say again after?"
"8E"
"8E copy"
내 관제를 듣고 웃으시는 기장님에게,
"아 기장님, 제가 너무 오랜만에 인천공항을 와서 촌티를 낸 것 같습니다."
"이게 자주 안 오다 보면 그래."
"이걸 못 듣다니, 피곤해서 그랬다는 핑계도 못하겠어요."
"그거 알아?"
"뭐가요?"
"사실 나도 못 들었어."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휑했던 인천공항 때문에 마음 아팠던 것 빼곤
너무 좋았던 이번 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