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꼭 누군가와 지낸 시간만큼 마음의 깊이가 비례하지 않을 때도 있다.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고작 3일을 같이 다녔지만, 여전히 연락하며 서로의 근황을 이따금씩 전하는 YH누나와 JH이형이 있고, 미국에서 비행 유학을 하던 시절 1년 동안 같은 집에서 하숙했던 MJ형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때보다 편하기도 하다. 물론 MJ형은 나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튼.
연인도 그렇지 않은가. 주변에서 보면 짧은 시간을 만나도 인연이 되어 좋은 결실을 맺는 커플도 있는 것처럼.
아, 또 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우리 포대의 대장이었던 포대장님이 기억에 남는다.
기억에 남는 이유는, 북한군이 우리 포대에 쳐들어왔을 때 마지막 탄환까지 사용해가며 사활을 걸고 싸우다가 결국 탄피가 떨어져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포대장님께서 극적으로 나타나셔서 적을 몰아내고 나를 구해주셨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고
그냥 병사들에게 정말 잘해주셨다.
덕장의 표본이랄까.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은, 우리 동기가 병장으로 진급하는 날이, 포대장님께서 중령 진급이 잘 안되신 날과 같은 날이었다. 우리 동기 모두 포대장님에 대한 좋은 마음과 존경심이 있는 상태라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병장 나부랭이가 감히 포대장님을 위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짱구를 열심히 굴리며 우리끼리 내었던 당시의 결론은, 병장 진급 신고라도 괜히 기분 좋은 티 내지 말고 신고만 딱 하고 나오자고 다짐하였고,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포대장님 방에 들어갔다.
우리 중에 가장 군번이 빨랐던 YI이의 신고를 필두로 조금은 엄숙한 분위기로 진급 신고를 하는데, 포대장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색 하나 안 하시고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내자며 오히려 우리를 응원해주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분명히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셨을 텐데 말이다.
그런 분이셨다. 전역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가끔 생각날 때마다 구글에 포대장님 성함을 쓰면서 진급은 잘 되셨는지, 지금은 어디에서 근무를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여 찾아보기도 했지만 당연히 관련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아무튼, 나의 인생에 그런 사람들이 몇 있었다.
이번 비행을 같이한 기장님과도 그런 이야기를 하며, 으레 남자들이 하는 군대 얘기까지 넘어왔다.
"망고 기장은 군대 어디 다녀왔다고 했지?"
"아, 기장님. 저는 공군 사병으로 다녀왔습니다."
"어디 있었어요?"
나의 근무지를 이야기하며 어떤 특기로 근무했는지 이야기하는 도중,
"혹시 그 포대 포대장 이름 기억나요?"
"당연히 기억나죠 기장님. KJC 포대장님이셨어요."
나의 대답을 들으신 기장님께서는 웃음을 터트리셨다.
"포대라 그래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JC이야?"
기장님은 포대장님의 성함을 마치 친구처럼 다정하게 부르시며 나에게 되물으셨다.
"혹시 기장님 아는 분이십니까?"
"알기만 하겠어, 지금 내 아내를 소개해준 놈인데. 내 공군사관학교 동기야."
아니 세상에, 마치 내가 스토커처럼 구글을 검색해가며 근황을 찾으려 갖은 애를 썼던 분께서, 지금 나와 같이 비행하고 계신 기장님의 동기시라고? 게다가 아내분을 소개해주실 정도로 가까우시다고?
"기장님! 혹시 포대장님 진급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이 질문부터 나왔다.
"그 후에 잘 진급했고, 지금은 아마...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을걸?"
정말 다행의 한숨이 나왔다.
그 누구보다도 잘 풀리셨으면 하는 분이었으니까.
착륙을 한 뒤, 다음 비행까지 시간이 두 시간 정도 남았기에 기장님께서는 포대장님에게 연락을 해서 나의 이야기를 하셨다.
어떤 부기장이랑 비행을 했는데, 이 친구가 10년이 지나도록 너를 기억하고 있더라. 혹시 기억이 나느냐. 이름은 무엇 무엇이고, 생긴 건 어떻고, 등등
나는 마치 소개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두근두근하며 기장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곧 통화를 끝내시곤 나에게 하시는 말,
"기억 안 난다는데?"
하하하하하
정말 당연한 일이다.
예상했던 일이다.
아니 생각해보라.
포대장님께서는 그동안 지나갔던 병사들만 수천명일 것이다. 나야 일개 병사로서 포대장님을 기억하는 것이지만, 포대장님께서는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을 하실까.
앗 그런데 갑자기 비가 온다.
이상하다.
분명 날씨가 맑다고 했는데.
주룩주룩
흑흑흑.
엉엉...
마음으로 울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안쓰러우셨는지 기장님께서는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한번 사진 찍어서 보내볼까? 얼굴 보면 기억할 수도 있잖아."
정말... 정말 만에 하나 얼굴까지 찍어 보냈는데 기억을 못 하시면 이 짝사랑의 결말은 새드 앤딩의 닫힌결말이 되어버린다. 고민이 되었다. 희망의 열린 결말을 선택할 것인지, 슬픔의 닫힌결말로 끝맺을 것인지.
나의 뇌는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소리를 쳤지만 나의 가슴은 해보라고!! 해보라고!! 외치고 있었다.
뇌를 버리고 가슴을 따랐다.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기장님!!"
찰칵.
나의 사진은 전송되었고,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띠링
기장님의 핸드폰이 울렸고, 나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자를 읽어주셨다.
"얼굴 보니 기억나네 ^^ 너무 반갑다. 그때도 에이스였는데, 지금은 부기장이 되었다니 대단하네. 그때는 검은색 뿔테 안경 쓰고 있었는데, 안경도 벗었고 그때보다 살이 좀 더 포동포동 쪘네 ^^"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나왔다.
나를 기억해주고 계셨다.
에이스라니 후후.(물론 당연히 에이스 아니었다.)
게다가 검은색 뿔테 안경까지 기억해주고 계시다니, 너무 기뻤다.
물론 포동포동 찐 살은 비행기의 기압으로 인해 사실은 조금 부은 것이라며 울부짖으며 변명하고 싶었지만 괜찮았다.
그날 비행이 끝나고 내려와 게이트에서 기장님과 인사를 하며 헤어지려는데 기장님께서 말씀하셨다.
"JC이 전화번호 줄까?"
"실례가 안 된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연락드려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비행에서 만나면 내가 JC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가우니까 같이 맥주 한잔 해요."
"정말, 너무 좋죠 기장님."
그날 포대장님의 연락처를 받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의 번호를 받은 것처럼 설렜던 나는
여전한 마음으로 포대장님에게 연락을 드렸고,
서로의 근황과 함께 언젠가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하자고 이야기를 했다.
정말 언젠가 포대장님과 같이 소주한 잔 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참, 인연이라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