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사이 제주공항의 날씨가 좋지 않았다. 이번 비행에도 제주공항의 날씨는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고 기장님과 나는 우리의 비행기를 격하게 환영해주고 있는 제주공항으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우리보다 선행하여 접근하는 다른 비행기들의 고어라운드 보고가 이따금씩 들리고 있었고, 그런 보고를 듣지 않아도 미친 듯이 흔들리는 우리 비행기의 상태로 보아 지금 날씨는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우리는 Localizer라고 불리는 신호에 정대를 했고, 이것은 비행기가 활주로의 Lateral path를 잘 지키면서 착륙을 위해 잘 가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관제사에게 우리 비행기가 Localizer 신호를 잡고 잘 정대했다는 보고를 했다.
"제주 Approach, OOOair xxx, established on the localizer Runway 25."
해석 ; 제주 접근 관제사님, 우리 비행기는 25번 활주로에 잘 정대했습니다.
Approach 관제사는 비행기가 제주공항으로의 "접근" 영역을 담당했기에, 이제 랜딩을 위해 달려가는 우리 비행기의 관제를 제주공항의 "이착륙" 영역을 담당하는 Tower 관제사에게 이양을 해주었다.
Approach 관제 : 공항으로의 접근을 관제해주는 곳
Tower 관제 : 접근이 안정된 비행기의 이착륙을 관제해주는 곳
"Contact 제주 Tower 118.1, GOOD DAY."
해석 ; 제주 공항 관제사에게 연락하세요. 주파수는 118.1입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관제사의 Good day라는 말을 들은 기장님께서는 옅은 웃음을 지으셨고, 나 또한 마른 웃음을 지으며 기장님께 말했다.
"기장님 ㅎㅎ 오늘따라 굿데이가 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주 의미심장한데...?"
지시와 응답, 요청과 허가 등의 딱딱한 관제만 있는 주파수의 세상에서 Good day라는 인간적인 인사는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다. 그리고 평소에도 나 또한 관제가 바쁘지 않은 시간대에서는 Good day라든지, Good one이라든지, 수고하시오,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혹은 외국을 갔을 때 그 나라의 언어로 인사를 하기도 한다. 이런 사소한 인사는 경직된 주파수의 세상에 작은 인간미를 가져다주는 느낌이다.
이따금씩 외항사 비행기의 외국인 조종사가 인천 관제사에게 "앤녕하쎄어, UPS XXX, FL 330."라고 하는 관제를 들을 때면 흐뭇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듣기 좋고, 따뜻하고, 웃음이 나오는 평범한 "Good day"었지만,
이런 날씨에선 마치 관제사의 Good day가 이렇게 들린달까.
"흐흐.. 어디 한번 이 날씨에 좋은 하루를 보내보십쇼 조종사 양반.. 후후."
물론 "Good day"라는 단어는 잘못이 없고, 당연히 선의의 관제사분에겐 이런 의도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우리의 상황만큼 바쁜 주파수에서도 친절을 잃지 않으셨고, 공항으로 접근하는 비행기들, 고어라운드하여 재접근을 하는 비행기들을 원활하게 관제하고 계셨다.
하지만 왜 일상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어제 먹은 음식 때문에 배탈이 났고, 여자 친구와 싸웠으며, 소중히 여겼던 바지의 가랑이 부분이 터져버려서 오랜만에 다른 바지를 꺼내 입었는데 늘어나버린 내 뱃살 때문에 단추가 잠기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에 누군가가
"안녕하세요! ^_^"
하면, 괜히 삐딱해져서
"안녕 못합니다."
라고 대답하여, 상대방의
"???"
를 이끌어내는 그런 상태.
게다가 측풍 성분이 너무 강한 상황이라 비행기는 활주로의 중앙을 정대해주는 선에서 좌우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일명 Crabbing이라고 하여, 비행기의 코가 돌아간 상태에서 접근 중이었다. 그래서 활주로를 식별할 때도 비행기 앞에 활주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돌려서 왼쪽을 봐야 활주로가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웃음을 터트린 건 기장님의 유머였다.
"망고 기장, 활주로가 눈앞에 왜 없지?"
"기장님 저어기 왼쪽에 있네요."
"쟤가 왜 저기 있지?"
"ㅋㅋㅋㅋㅋ"
"우리 비행기 저기 활주로 쪽으로 가고 있는 거 맞지?"
"ㅋㅋㅋㅋ 예 기장님, 저도 잘 믿기진 않는데 계기는 정확하게 중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오토파일럿도 끊기겠다."
"비행기 정말 너무 흔들리네요."
이런 날씨에 나는 바짝 긴장을 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도 내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시려는 기장님의 배려에 웃음이 났다. 점점 더 활주로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고, 기재 취급을 끝낸 뒤 기장님께서는 아까보다는 조금 웃음기가 빠진 목소리로 말씀을 하셨다.
"접근하면서 조금이라도 불안정한 부분 있으면 적극적으로 얘기해줘요."
"네 기장님, 알겠습니다."
두 번의 큰 사이렌과 함께 오토파일럿은 끊겼고, 조종간을 잡고 있는 기장님은 이런 날씨에도 비행기를 안정시키며 안전하게 비행기의 바퀴를 활주로에 접지 하셨다.
착륙 후 게이트에 비행기를 주기시키고 승객들이 하기 하는 중, 내가 기장님에게 말했다.
"아, 기장님. 진짜... 고생 너무 많으셨습니다."
"내가 원래 날씨 요정이라 항상 날씨가 좋았는데, 오늘 날씨가 이상하네."
요 근래 나는 이상하게도 날씨가 좋지 않은 날 비행을 했던 게 생각나서 말했다.
"기장님 생각해보면 제가 날씨 요괴인 것 같기도 하고.."
"ㅋㅋㅋㅋㅋ"
승객들의 하기가 끝나고 비행기에 앉아있는데도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도대체 바람이 얼마나 강하길래.
궁금해서 비행기 밖을 나가보았다.
매고 있던 나의 넥타이가 내 어깨 뒤로 넘어갔고 바람은 나의 싸대기를 때리고 있었다.
나의 이마가 훤히 보일 수 있게 바람이 친절하게 내 머리카락을 까 뒤집고 있었고
게다가 싸락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나의 피부에 강력하게 모이스춰롸이징을 해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해본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곳의 눈 싸대기도 제주공항의 싸락눈
싸대기보단 따스했던 것 같다.
날씨 요정 기장님과, 날씨 요괴 부기장의 비행.
정말 나에게 엄지가 서른 개만 더 있었다면,
기장님에게 왕따봉 서른 두 개를 드리며 감사하다고 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