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둘
방콕 이야기 하나
https://brunch.co.kr/@oldmango/123
시장거리로 들어왔다.
비록 낮이었지만, 여긴 야시장이다.
'야생의 시장'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풍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는 고수와 샐러리를 잘 먹는 나 조차도 머리 위에 물음표를 두어 개 정도 띄우는 정도였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그 냄새의 콜라보 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살아있기도 하고, 이제는 생을 다하기도 한 온갖 종류의 육지 동물과 해양 생물과 공중의 존재들이 하나같이 부끄러움을 잊은 채 옷을 벗고 있었다. 아니, 옷이 벗겨져있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 이 길을 지나갔다면 열 걸음도 채 주지 못하고 돌아갔을 정도로 이곳은 야생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숱한 배낭여행과 오지 여행으로 단련이 되어있는 사람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고기들을 세상 신기하게 바라보며 걸어가는데, 이곳에 이방인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내가 시장을 보는 신기한 눈빛 정확히 그대로 시장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저기 누워있는 개구리와 나와의 유일한 차이점은 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일까.
그렇게 한동안 투어를 하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가게 안에 숨어들었다가, 또 과일 코너가 있길래 두리안도 하나 사 먹어봤다가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밥도 먹었고, 로컬 야시장도 구경했으니 여행이 아닌 관광을 하나 해볼 참이었다.
야경이 예쁜 곳을 찾아보니, 왓 아룬이라는 사원이 유명하다고 했다. 영어 이름은 "Temple of Dawn". 이름부터 멋이 철철 넘치는 이곳,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목적지를 정했으니,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근데 그 운이 가끔 조금 이상할 때가 있다.
왓 아룬, 즉 아룬 사원으로 가는 길은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사원을 고작 100m 남겨두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는 길에 비가 왔으면 포기하고 돌아갔을 텐데, 저 앞에 보이는 왓 아룬을 두고 갈 순 없다. 템플 오브 던, 그것을 눈 밖에 두고 갈 순 없다.
하지만 여기서 비를 쫄딱 맞아서 감기라도 걸렸다간, 내일 비행에 지장이 생기니 일단은 나무 밑에 숨어 타이밍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한 15분쯤 지났을까, 승려들이 하나 둘 우산을 쓰고 사원 쪽으로 걸어간다. 비도 조금 약해진 것 같다. 승려를 따라 사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다가갈수록 나를 압도하는 사원의 모습은 부끄러움이라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자태로 당당하고 꼿꼿하게 그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정말,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사원이었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숨어 한참을 바라봤다.
사진을 찍을 시간에 내 눈에 더 담고 싶었다.
이 사원을 강 건너편에서 찍었다면 훨씬 아름답게 나왔겠지만, 지금 내 눈앞에 압도적으로 큰 크기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있는 모습은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길 여러 차례,
이제는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사원 앞, 택시 한 대가 있다.
호텔까지 얼마냐고 물었다.
"400바트"
흥정의 신인 내가 말했다.
"200 바트"
기사 아저씨가 말했다.
"굿바이"
우르르그ㅡ크ㅡ그큭ㄱ코ㅓ코쾅
이어서 들리는 천둥번개 소리.
다시 내가 말했다.
"쏘리, 400 바트"
"오께이~"
흥정의 신도 날씨 앞에선 장사 없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
기장님께서 물으셨다.
"여행 잘했어요?"
"기장님, 오랜만에 여행 같은 여행 하고 온 것 같아요."
"그래요? 너무 잘했네. 방콕 바나나는 못 먹어봤죠?"
"방콕 바나나요?"
그리고 받은 아주 깜찍한 바나나까지,
비행이었지만, 오랜만에 여행 같은 비행이었다.
비록 기장님께서 알려주신 왕궁 투어, 맛집 어느 한 곳 가진 못했지만, 내가 대학생 때 늘 하던 그런 여행 같은 비행이었고, 깜찍한 바나나의 마무리까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역시, 여행이란
예상대로 되는 것 하나 없이
고생은 고생대로 해야
제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