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 커플, 혹은 승무원 부부가 누릴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는 바로 레이오버 스테이션이 겹치는 일이다.
비행을 가면 짧으면 1박 2일, 길면 3박 이상의 스케줄 패턴이 있기에 서로 다른 항공사를 다니더라도 운이 좋아서 비행 간 나라가 겹치게 되면 해외에서 만날 수가 있다.
일을 하러 갔음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잠깐이나마 만나 여행 같은 하루를 보내는 일, 근사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근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날 일은 없었다.
서로가 스케줄이 나오는 날 어디 겹치는 나라가 있는지 눈이 빠지게 쳐다봐도, 아니, 굳이 눈이 빠지지 않게 대충 쳐다봐도 겹치는 일이 없었다.
같은 나라에 같은 도시까지 겹치는 그런 근사한 스케줄은 없었어도, 근사한일에 거의 근사한 스케줄이 한 번 있었으니 바로 나의 마카오 3박 4일 스케줄과 아내의 홍콩 1박 2일 스케줄이 겹치는 날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내가 마카오에 도착한 날 다음날 저녁에 아내는 홍콩에 도착하고, 아내가 홍콩에서 한국으로 다시 출국하는 날의 다음날 저녁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다시 말해, 딱 내 3박 4일 스케줄 중간에 아내의 홍콩 1박 2일이 겹친 것이다. 나의 의지만 있다면 아내를 보러 가는 것은 일도 아닌 일. 마침 서로 비행하느라 집에 같이 있는 시간도 적은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말했다.
"홍콩으로 보러 갈까?"
"오빠가 와도 너무 짧게 보는데, 힘들지 않겠어?"
홍콩으로 오고 가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너를 보지 못하는 일이 더 힘들다는 로맨틱, 낭만 오져버리는 대사를 뱉었으나 느끼함 조절이 실패하였는지 처음에는 아내의 반응이 시큰둥했다가, 이내 홍콩 맛집을 검색하는 우리였다.
마카오 도착 당일,
새벽 1시 30분이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2시 40분. 자고 일어나면 아내를 보러 홍콩을 간다.
기장님에게 상황 설명과 함께 마카오로 복귀 계획 또한 말씀드렸다. 해상으로 이동할 것이며, 천재지변으로 인해 불가능할 시 육로로 이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로가 차단된다면 비행기를, 비행기조차 뜨지 않는다면 수영을 해서라도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 걱정하지 말고 가서 아내분이랑 시간 재밌게 잘 보내고 와요."
다음날,
페리를 타러 선착장으로 갔다.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가는 선착장은 두 곳이 있다. 마카오 외항터미널과 타이파 섬에 있는 터미널. 마카오 여행을 온 사람이라면 보통 세나도 광장이 있는 마카오 반도 쪽에 숙소를 잡았을 테니, 북쪽에 있는 외항터미널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겠지만 내가 머무는 호텔은 남쪽 타이파 반도 쪽에 있기에 나는 타이파 페리 터미널로 갔다.
원화 26,000원 정도 가격을 내고 표를 사고 페리에 탔다. Wi-fi는 잡혔지만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옆자리에는 홍콩에 거주하는 할머니가 앉아계셨고, 나에게 광둥어로 말을 거셨기에 나는 현대 문물 기술력의 최고봉 파파고를 이용하여 국제적인 소통을 누려보려 하였으나, 이마저도 섬과 멀어지면서 LTE가 끊겼기에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안 되는 손짓 발짓 해가며 아내를 보러 간다고, 사진도 보여드리며 자랑을 했고 나에게 엄지 두 개를 날려주셨다.
역시 쌍따봉은 국제 표준어로서 가치가 있다.
그렇게 성사된 아내와의 만남.
저녁시간이었기에 첫날은 간단한 먹거리를 사 갖고 들어와 호텔 방에서 시간을 보냈고, 다음날 우리는 홍콩 시내로 나갔다.
아내의 출근은 저녁 12시경. 점심과 이른 저녁정도 먹고 아내를 보내주어야 했다. 조금 쉬고 나가야 밤을 새워서 돌아오는 스케줄에 덜 피곤할 테니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를 걸었다.
마치 우리가 스타가 된 것처럼.
그리고 북경오리를 먹었다.
마치 우리가 북경에 있는 것처럼.
시내에 돈키호테에 가서 쇼핑을 했다.
마치 우리가 일본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생긴 지 얼마 안 된 쇼핑몰인 K11 MUSEA를 가서 아이쇼핑을 했다.
마치 우리가 돈이 흘러넘치는 사람인 것처럼.
저녁을 먹으려고 나왔다.
마치 우리가 배고픈 사람인 것처럼.
아니, 이젠 진짜 배고플 시간이지.
그렇게 아내와 행복에 겨워 데이트를 하는데 홍콩에 살고 있는 친구 JY 로부터 연락이 온다.
'망고야, 홍콩 지금 태풍 경계태세 발령됐고, 점점 심해지는데 너 페리 타고 마카오 돌아가는 것 괜찮겠어?'
응?
행복에 눈이 멀어 모든 세상이 아름다워 보여, 미처 하늘을 보지 못했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 대류활동이 충만하여 모든 비행기와 배를 괴롭힐 것처럼 생긴 적란운이 몽글몽글 생기고 있었다.
홍콩에서는 태풍의 강도를 T1, T3, T8, T9, T10으로 표현하는데, T1은 경계, 그리고 숫자가 높아질수록 위험해지는 것이고, T10은 말 그대로 최대 시속 220km/h이상의 바람이 부는 정도의 강도다.
다행히 아직은 T1이었지만 친구가 보내준 날씨 정보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날씨 자료를 수집하여 보니, 오늘 저녁부터 날씨가 안 좋아질 것이 분명했다. 페리가 결항될 것 같고... 육로도 아마 차단될 것 같고... 비행기도 안 뜰 것이 분명한데... 그럼... 수.. 수영...?
이 날씨에는 내가 전생에 물개였어도 조금 힘들 것 같았다.
"오빠, 안 되겠다. 저녁은 내일모레 오빠 한국 오면 집에서 먹자."
"그치, 아무래도 날씨 안될 것 같아."
그렇게 우리의 근사한 홍콩 데이트는 짧지만 아주 강렬하게 끝났다.
아내를 먼저 택시 태워 호텔로 보내고, 나는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선착장으로 왔다.
다행히 아직은 페리가 다니고 있었다.
Wi-fi가 잡히지만 여전히 신호는 없는 페리에서 1시간을 보내며 마카오로 돌아왔고, 그날 다행히 아내의 항공편은 결항되지 않았다. 다만, 나는 태풍 때문에 원래 3박 4일이었던 레이오버 일정이 4박 5일로 늘어났다. 날씨에 대한 언질을 준 친구 JY에게 고맙다고 연락했다.
"마카오에서 먹고 살 거 준비하고, 식당 다 닫을 거야."
통상 이런 날씨에는 가게들이 다 문을 닫는다. 덕분에 나는 떡볶이와 아직 문을 열고 있는 편의점에서 생존식량을 샀다.
호텔방에서 안전하게 생존하고 다음날 일어나니, JY에게 연락이 와있다.
"아슬아슬했어. 어제 T10까지 올라감."
"태풍 승진속도 쩌네. 하루 만에 T1 -> T10이라니."
나보다 먼저 한국에 도착한 아내에게 사진 한 장과 연락이 온다.
아내를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내가 지하철 타러 걸어가는 뒷모습이었다.
'오빠 ㅠㅠㅠ 홍콩 레이오버에서 나 진짜 행복을 느껴쪄 ㅠㅠㅠ'
아슬아슬했지만, 그만큼 행복했던 아내와의 홍콩 데이트.
오늘 같은 날들이 결혼생활에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그랬다.
큰 슬픔은 작은 기쁨들로 잊고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날처럼 작은 기쁨이 아닌 큰 기쁨들이 모이면, 인생의 T10 같은 태풍이 와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70살이 넘어서도 아내와 젊었을 적 홍콩 데이트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물론 태풍이 안 오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