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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저런 미친 여자가 좋더라

by 망고 파일럿



여행 막바지가 되면 늘 그렇듯 그동안의 여행을 정리하며 내가 가진 넉넉한 시간들을 그저 걸어 다니며 보내도 즐겁다. 특히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있으면 딱히 할 일이 없는 일상에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에 다녀와보는 일도 좋았다. 이른 새벽의 여명과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불빛이 공존하는 시간에서 내가 본 풍경은 노을 지는 밤의 시간과 겹치지 않았다.

특히 그 마지막이 해변가라면 그럴싸한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고 친구들 앞에서 우쭐대 봐도 좋다. 시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낮은 건물들과 소금 냄새 섞인 바닷바람, 언제 뛰어들어가도 좋은 적당한 온도의 바다는 그동안 쌓였던 여행의 긴장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곳에서 여행을 마무리했다면 얼마든지 자랑해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잔지바르섬의 해변들은 여행을 정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고운 연주 소리가 들릴 것 같이 하프처럼 일렁이는 바닷 결과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달콤한 음식 냄새는 이곳에 눌러앉아 여행을 일상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다.

특히 여행 마지막 즈음에는 시간 부자가 된다. 해야 할 일도 없고 쫓기는 일도 없이 오로지 나를 위해서 그 많은 시간을 다 쓸 수 있다. 능귀해변의 마지막 날, 부자가 된 나는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다가 넘쳐나는 시간을 어디 한번 좀 써볼까 해서 해변가를 걷기 시작했다.

경치를 보며 혼자서 '와, 와!' 감탄하며 걷다, 나무 그늘이 보여 그 아래로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모래 표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휘저어 평평하게 만든 뒤 그대로 엉덩이를 내리꽂았다. 팔을 머리맡에 놓고 왼쪽 다리를 접고 나머지 다리를 꼬아서 올렸다. 이때 영화처럼 노랫소리라도 들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노팅힐’의 주제곡인 엘비스 코스텔로의 ‘She’ 정도면 지금 풍경이 가진 낭만이 한껏 무르익을 텐데. 작은 멜로디라도 들릴까 싶어 눈을 감고 귀를 집중해봤다. 주변의 소리가 들린다. 박자도 없고 가락도 없지만 퍽 자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 떠드는 소리, 바람에 흔들려 저들끼리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 끝내 모래사장에 닿지 못해 내뱉는 파도의 탄식 소리.

눈을 감은 채 아쉬운 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도 제대로 생각이 안 나고 멜로디도 뒤죽박죽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나오는 대로 흥얼거렸다. 한 노래를 끝내기보단 짧은 구간을 반복했다. 이렇게도 불러보고 저렇게도 불러보고 나름의 기교를 넣어서도 불러보았다. 본디 아무도 듣지 않는 공간에서는 누구나 감성 충만한 가수가 되어 본 적이 있으므로 지금 난 해변을 공연장 무대로 한 작은 콘서트를 열어볼 참이었다. 아마 멀리 떨어진 누군가의 귀에는 노래 못하는 목청 좋은 새의 지저귐 쯤으로 들렸으리라.

이번엔 ‘She’를 부르기 시작했다. ‘She~~~’로 시작하는 부분 말고는 가사를 몰랐으므로 뚜루루와 같은 스캣(이라고 하자)을 넣으며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원곡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의 노래에 만족스러워지려는 찰나였다.

쿵!
나의 노래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평화로운 지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다. 이건 분명 둔탁하고 거대한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니 다른 여행자 한 명이 앉아있다. 가벼운 인사를 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내 노래를 들은 게 분명했다. 숨을 공간이 없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처음보다 훨씬 더 부자연스러운, 심지어 이제는 떨리는 톤으로 제법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 모습을 보다 못한 그가 말한다.

“노래 좋은데?”

눈빛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 외모만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 느낌만으로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말 한마디에 마음을 뺏기기도 한다. 지금 나에게 말은 건 여행자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배려가 기분 나쁘지 않아 웃어 보였다. 그와 시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언뜻 보이는 수평선 위로는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 둘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눈길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니 만들다 만듯한 비키니 한 장을 입은 어떤 여인이 거의 나체인 상태로 걸어온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는 당당한 그녀 자태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옆의 여행자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고 내가 말했다.

“여기 누드비치였어?”
“아니. 저 여자가 미친 거야.”

내가 웃자, 그가 한마디 덧붙인다.

“근데 난 저런 미친 여자가 좋더라.”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둘 다 하염없이 지는 노을만 바라봤다. 노을 색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예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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