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에서 회계학과를 전공했다.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처음에 학부로 입학을 해서 2학년 때 세부적으로 학과를 선택할 수가 있었는데, 경영학부로 입학한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경영학과와 회계학과. 나는 회계학과를 선택했는데, 회계학과를 가고 싶어서 선택했다기보다는 경영학과를 가기 싫었다. 경영학과에는 조별과제가 많았다. 하지만 많은 대학생들이 조별과제를 하며 온갖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꼈듯이 나 또한 대학교 1학년 때 조별과제를 통해 인생의 단맛 쓴맛 매운맛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조별과제가 많이 없는 회계학과의 소개를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
‘아, 이건 내 운명인데?’
내가 회계학을 잘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상관이 없었다. 비록 대학교 1학년 때 회계학 원론의 학점은 C+였나, B-였나, 아무튼 확실히 나에게 회계학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친절하게 팩트로 후두려패는 학점이었지만, 단지 조별과제만 없다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회계학과를 선택할 이유는 충분했다. 이렇게 조별과제 혐오증을 가진 사회성이 조금 결여된 나는 스스로 사회성이 조금 떨어져도 먹고살 수 있는 학과가 있다는 희망으로 회계학과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회계학을 대차고 자신 있게 선택했던 아이는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장차 잘 나가고 유망하고 유능한 회계사나 세무사가 되기는커녕 학과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조종사라는 길을 선택했다. 가끔씩 대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반응이 한결같다.
“조종사 됐다며?”
“이야~ 너가 조종사가 될 줄은 몰랐다.”
“너가?”
친한 친구일수록 공격성이 짙은 반응들이 많았지만, 뭐 어쨌든.
항공사 부기장이 되는 길은 생각보다 꽤 다양하다. 공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를 하다가 전역하고 항공사에 입사하는 방법도 있고, 항공대학교나 한서대학교 등 항공운항학과가 있는 대학교를 전공하여 연계과정이나 항공사에 직접 지원을 통하여 입사하는 방법도 있다. 꼭 이 분야가 아니더라도 다른 일을 하다가, 혹은 다른 공부를 하다가 한국에 있는 사설 비행 학교에서 비행시간을 쌓아 입사하는 방법도 있고, 해외에 있는 항공대학교나 나처럼 항공과는 관련이 하나도 없는 학과를 졸업하여 미국 사설 비행학교에서 비행시간을 쌓고 한국으로 돌아와 입사를 하는 방법도 있다.
그만큼 다양한 루트에서 입사를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상대적으로 특정 출신의 수가 많고 적고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출신의 기장님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출신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자기소개’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직업 특성상 거의 매번 다른 기번의 비행기로 다른 기장님과 비행을 한다. 즉,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처럼 사수가 있고 맨날 보는 사람이 여전히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있고, 힘들 때 탕비실에 동기들끼리 모여 나를 괴롭히는 선임을 질겅질겅 씹어가며 신세한탄을 할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인 칵핏에는 나를 제외하고 딱 한 분 계시고, 그 자리는 거의 매번 다른 분이 앉아계신다. 동기? 밖에서 만날 수나 있으면 다행이다. 오늘 휴일인데 심심해서 뭐하냐고 문자를 보내면 이런 답이 온다.
1. '나 제주도야.'
2. '형 지금 다낭이야.'
3. 답장이 안 오다가 9시간 정도 후에, '나 아침에 랜딩하고 자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우리 회사만 해도 조종사가 대략 450명 정도가 되며, 내가 타는 보잉 737 기종에서 기장님은 180명 정도에 부기장님은 190명 정도가 있다. 190명의 부기장이 180명의 기장님과 랜덤으로 짝을 맞춰 비행을 한다 생각해보면 같은 기장님을 일 년에 과연 몇 번이나 마주칠 것 같은가. 일 년에 두 번 이상 마주치면 많이 마주치는 거다. 심지어 한 번도 같이 비행을 못한 채 1년이 훌쩍 가버리는 일도 일상다반사이다.
그러다 보니 생긴 건지, 아무튼 다른 직종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에게는 없는 이곳만의 특이한 특징이 있다. 나처럼 아직 입사 3년 차 쭈구리 부기장 나부랭이 같은 경우에 특히 더 심하게 나타나게 되는 특징인데, 비행을 위한 브리핑이 끝나면 "자기소개드리겠습니다."로 시작하는 일련의 나의 인생에 대한 소개를 짧게 약 1분 정도로 압축하여 기장님께 말씀을 드리는 행동이다.
이미 한번 같이 비행한 적이 있는 기장님이거나, 안면이 있는 기장님과 비행이 나온 경우는 이러한 과정이 자연스럽게 생략이 되겠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입사 3년 차, 그리고 그중 훈련기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비행한 기간은 1년 반 정도, 그리고 그중 코로나 기간을 제외하면 휴직 없이 연속으로 비행한 건 고작 5~6개월에 불과한 나부랭이니까, 처음 뵙는 기장님이 많이 계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자기소개"라고 해서, 뭐 예컨대 내가 입사할 때 사용했던 것처럼
"안녕하쉽니카! 열정적이고 꼼꼼한 지원자 XXX입니다!! 저는 조종사라면 안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장점은 뭐고 단점은 뭐시기고! 저시기고! 이걸 극뽁하기위해 이런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왔기에 이 회사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부담스러운 멘트가 아니다.
그저 같이 오늘 하루, 혹은 며칠 동안 같이 비행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편하게 말씀드리는 과정이다. 사람마다 그 소개의 순서나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는 대충 이렇다.
이름, 나이, 사는 곳, 결혼 여부, 대학 전공 그리고 미국에서 비행했던 경험 순서로 소개를 드린다.
보통 나이를 말씀드릴 때 "아이 젊다~부럽네." 정도를 한 번 듣고, 미혼이라고 말씀드릴 때 "아~~ 부럽다!!" 한번 듣고, 미국에서 비행했다고 했을 땐 겹치는 곳에서 비행하셨던 기장님이라면 어느 지역이냐면서, 당신도 그 근처에서 비행했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종종 있으시다. 자기소개를 처음에는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무의식 중으로 해왔었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 뵙는 기장님과의 우연한 공통점이 생기기도 하고 괜히 조금 더 가까워지는 기분도 든다.
일이라는 게 일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닌 것처럼, 비행 또한 로봇처럼 비행만 하는 게 아니니까 저런 짧은 서로의 자기소개를 통해서 기계적인 비행 속에서 기장님과의 인간적인 관계가 생성된다고 하면 그 1분이 결코 낭비될 것도 없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출근을 해서 비행 브리핑을 마치고 기장님에게 자기소개를 드리고 있었다.
"어쩌고 저쩌고, 전공은 회계학이었으며 어쩌고 저쩌고"
"오우 회계학 전공했어요?"
"네 기장님, 세무사 1차까지 합격했다가 공부하기 싫어서 여행 다니다가 이 길로 들어왔습니다."
"이야~ 아깝지 않아요? 수학도 잘하겠네 멋있다."
"하하 기장님, 그래도 저는 이 일 하고 있는 게 더 좋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수리영역에서 거의 매번 1등급이었고, 수능 때는 92점을 맞아 1점 차이로 아쉽게 2등급을 받았지만 고등학교 때 영어와 함께 가장 자신 있는 과목 중 하나였다. 그래 뭐 쭉 1~2등급 유지해왔으니까 수학을 못하는 것까진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아닙니다^^"따위의 겸손은 고이고이 접어두고 그렇게 약간의 으쓱한 어깨를 장착한 뒤, 기장님과 나는 웃으며 분위기 좋게 비행을 출발했다.
비행기에 도착하여 난 비행 준비를 마치고 실제 승객분들이 타신 자료를 바탕으로 비행기에 제원을 입력 중이었다. 이 작업은 정말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인데, 이유는 만약 수치를 잘못 입력하여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잘못된 비행 정보가 나온다면 비행기가 운항할 때 큰 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장님과 서로 상호 확인을 하며 입력을 해야 하고, 절차 중 무게를 입력하는 절차가 있는데, 여기서 기장님께서 숫자를 읽어주시면 나도 그 숫자를 눈으로 확인하고 FMC(비행기 컴퓨터)에 입력한 뒤 그 차이를 내가 기장님에게 육성으로 불러주어야 했다. 사실 정말 간단한 산수로서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한 뒤 기장님께 그 차이를 불러주면 되는 단순한 덧셈 뺄셈 작업이었다.
회사로부터 자료가 전송되었고, 나는 142,700파운드와 143,300파운드의 차이를 육성으로 불러드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플러스 800파운드!”
"응?"
"아, 플러스 700... 600 파운드 차이 납니다."
첫 번째 레그부터 실수라니, 아니 그럴 수 있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다. 지금의 실수를 괜히 마음에 담으면 이후에 해야 하는 모든 절차가 무너진다. 신경 쓰지 말자. 수리 영역에서 1~2등급을 놓쳐 오지 않았던 원숭이도 간단한 산수라는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니. 그리고 좀 더 인간적이지 않은가.
'두 번째 레그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리.’
다음에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
굳은 다짐으로, 첫 번째 레그를 잘 마치고 그다음 비행을 바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회계학과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단 부기장이 기장님에게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에도 칵핏 안에 앉아 단계적으로 필요한 비행준비를 하며 실제 승객수에 따른 무게를 바탕으로 비행기에 숫자를 입력하는 작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로부터 무게 자료가 전송되었고, 나는 전송된 자료를 기장님과 상호 확인을 하기 위해 당당하게 기장님과 나 사이의 공간에 펼쳐 올렸다.
촤악!
손바닥 크기 정도의 작은 종이에 빼곡히 적힌 숫자들이 보인다.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매 비행마다 늘 해오는 작업일 뿐이다.
그리고 간단한 산수이고, 나는 회계학과 출신이다.
이번에는 145,200파운드와 145,700파운드의 차이를 구하는 상황이었다.
“플러스 600 파운드!!!… 아.. 아니, 500파운드입니다!”
멍청하게 시작해서 결국은 정확한 숫자를 불러내어 비행에 문제는 없었지만, 민망한 기류는 안 그래도 작디작은 칵핏을 안의 공기를 후끈하게 만들었다. 깔끔하지 못했던 나의 산수 실력을 지켜보신 기장님께서 웃으시며 말했다.
"아니, 회계학과라며."
"죄송합니다."
사실 차마,
회계학과 학생들은
10 더하기 3조차
쌀집 계산기를 두들긴다고
정말 차마,
말씀드리지 못하였다.
기장님, 저에게 쌀집 계산기만 있었더라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구몬학습을 좀 다시 펴봐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