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때,
내가 조종사가 되었다고 하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나 공짜 티켓 줄 수 있냐?"
물론 나의 대답은 매번 똑같다.
"아니, 니가 내 비행기 타면 온도 조절은 좀 더 신경 써서 잘해줄 수 있어."
조종사 친구 쓸모없다며 손을 휘휘 저어대는 친구들에게 나는 발끈하며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너가 타는 비행기가 결항될지 안 될지 날씨 정도는 미리 봐줄 수 있어."
참 도움 안된다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를 타박하던 황 씨 가문의 진혁이는 결국 몇 개월 뒤 연락이 왔다.
"망고야, 나 내일 제주도 가는데 비행기 결항되냐?"
"몇 시 비행기야?"
"1시 반."
"기다려봐."
예끼 이놈.
조종사 친구 쓸모없다며, 결항 여부를 알아봐 준다고 했을 때 그렇게 타박하던 이놈이 결국 머리를 조아리며 연락이 온 것이다. 여기서 치졸하고 치사하게 예전 일을 들먹이며 알아봐 주기 싫다고 나갈지, 아니면 넓은 마음과 아량으로 녀석의 간절한 청을 들어줄지 고민을 하다가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나는 치졸한 이 녀석과는 다르게 아량 넓은 사람이니까.
덧붙여 조종사 친구가 결코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도 조금은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항공 기상 예보를 보니 친구의 비행기가 이륙하는 시간이 참 애매한 기상에 걸려있었다. 사실 바람의 수치만 보면 비행기의 제한사항 내에 있어 이륙할 수는 있었지만, 구름과 기상이 올라오는 레이더를 보면 표기된 기상보다 더 악화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설령 간신히 이륙한다 해도 제주 공항의 날씨가 착륙하기에 좋은 날씨도 아니었다. 착륙 제한치에 간당간당하게 걸려있다. 늘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준비하고 보수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는 진혁이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결항될 것 같은데?"
"아씨 그래?"
물론 진혁이의 비행기는 떴다.
그 바로 다음 비행기부터 결항됐다 하더라.
나는 한번 더 조종사 친구 쓸모없다는 타박을 들어야만 했고, 신뢰와 명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내 비행기를 탔을 때 기내 온도의 쾌적성도 이제는 미심쩍을 것 같다는 불신 섞인 VOC까지 들어야만 했다.
이럴 때 친구에게,
"야, 25만 원에 런던 한번 다녀오고 싶지 않냐?"
라는 세상 모든 생색이 도사리고 있는 문장을 내뱉으며 명예회복을 하고 싶었지만, 나에겐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실제로 중동 어느 항공사는 '버디 티켓'이라고 해서 친구에게 조금 저렴한 가격에 항공권을 선물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우리나라 항공사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 그런 복지를 갖고 있는 항공사보다 그렇지 않은 항공사가 훨씬 많을 것이다.
아무튼, 바닥으로 추락해버린 '조종사 친구'의 타이틀을 회복할 길이라곤 그 친구를 내 비행기에 태워 보다 쾌적하디 쾌적한 기내 온도를 만들어주고, 조금 더 부드러운 착륙을 해주는 길밖엔 없었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우선 진혁이가 매번 비행기를 타며 출장을 다니는 직업도 아니고, 설령 가끔씩 비행기를 탄다고 해도 타 항공사의 가장 저렴한 티켓을 구했다는 그 행복감 하나만으로 친구가 조종하는 비행기를 탄다는 뿌듯함 따위는 가벼이 무시할 수 있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내가 타는 보잉 737 기종은 칵핏 안에 기내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달려있다. 그리하여 만약 친구가 나의 비행기를 탄다면 생색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보다 쾌적한 기내 온도인 것이다.
진혁이 사건 이후로 다짐한 일이 있다.
첫째, 결항 여부에 관련된 질문은 받지 않기.
둘째, 지인이 내 비행기를 탔을 때 쾌적한 기내 온도 조절과 부드러운 착륙은 꼭 제공하기.
첫째 다짐은 잘 지켜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행히 그 후로 그 누구도 나에게 결항 여부를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신뢰가 바닥을 쳤기 때문인지 혹은 결항 여부가 애매한 기상에 비행기를 타는 내 친구들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도 잘 지켜올 수 있는 다짐이었다.
아, 참고로 지인이 타지 않았다고 해서 기내 온도를 함부로 조절해대거나 랜딩을 개판 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매번 신경 쓰고 랜딩도 안전한 착륙을 전제하에 최대한 쾌적하게 하려고 하지만,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아는 사람 탔다고 하면 온도조절기에 눈길 한 번이라도 더 가는 것. 쾌적한 25도를 평소에 맞춘다고 치면, 지인이 탔을 땐 25.3도를 맞추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 책을 쓴 부기장은 지인이 탔을 때만 신경 쓰나 보지?'류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첨언이었고.
두 번째 다짐은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다가 처음으로 지킬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김포에서 출발하여 제주도에 도착해 하룻밤을 제주도에서 보내고 그다음 날에 다시 김포로 돌아오는 1박 2일짜리 스케줄이었다.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뉴스에서 태풍 경로에 대해 연신 떠들어대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제주 국제공항의 일기예보를 찾아보니 제주 날씨가 심상치가 않았다. 자칫하면 결항도 될 수도 있는 날씨였다. 1박 2일짜리 스케줄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마음에 2박 3일 치의 양말과 속옷, 여분의 유니폼을 챙겨서 출근을 했다.
브리핑실에 도착해서 비행준비를 하고 있는데 구름 생김새가 어째 악마같이 생기고 불편하게 생긴 게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는 양상으로 보고가 되고 있었다. 양말과 속옷을 한벌씩 더 챙기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비행에 필요한 서류를 뽑아 정리를 하고 앉아있는데 마침 같이 비행을 가는 기장님께서 도착하셨다. 들고 오신 캐리어를 슬쩍 보니 1박 2일 치의 짐보다는 확실히 뚱뚱해 보였다. 비행 브리핑을 시작하는데 제주 위로 살금살금 올라오고 있는 불편하고 부정적으로 생긴 구름 떼를 보시더니 기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제주도 날씨가 많이 안 좋네요. 내일 못 올라올 수도 있겠어요.”
“예 기장님, 바람이 생각보다 너무 안 좋네요.”
“난 양말이랑 속옷 한 세트 더 챙겼는데, 망고씨는?”
“한 세트 더 챙겼습니다.”
“역시.”
다행히 도착한 당일은 기상이 크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나를 깨운 건 모닝콜도 아닌, 휴대폰 알람도 아닌, 미친 듯이 트월킹을 추고 있던 창문이었다.
우콰코콬카카코코캉
바람이 어찌나 강한지, 굳게 닫혀있는, 아니, 굳게 닫혔다고 믿고 싶은 내 호텔방의 창문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바다가 보이는 오션뷰 방으로 받았기 때문에 바람의 강도가 훨씬 심했다. 창문 아래로는 빗줄기가 줄줄 새고 있었고, 이 방에 가습기 대신 자연 모이스쳐롸이징 옵션이 있지 않은 이상 빗줄기가 새는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늘의 비행이 결항되는 건 둘째치고 이러다가 내가 호텔 밖으로 날아갈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저.. 저기요… 정말 죄송한데… 창문이 깨질 것 같아요… 방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나의 요청에 흔쾌히 호텔은 바다 반대편, 즉 도로와 건물들이 보이는 쪽으로 방을 옮겨주었다. 다행히 바뀐 방의 창문은 바다 쪽 창문보다 조금 더 우직한 녀석이었다. 우리 집 세탁기 탈수할 때 돌아가는 그 속도로 흔들리는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내 방은 탄자니아 잔지바르섬의 능귀 해변의 아침처럼 고요하고 평온했다. 여유가 생긴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며 창문 바깥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어대는 야자수들을 감상하며 감탄을 했다. 역시 삼다의 도시 제주도다. 왜 바람이 삼다 중 하나로 들어갔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조금 지나자 회사로부터 오늘의 스케줄이 변경되고 캔슬되고 있다는 문자가 오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원래 1박 2일로 예정되었던 나의 비행은 태풍 때문에 결항이 되어 2박 3일로 늘어나게 되었다. 스케줄이 몇 번이나 바뀌고 나서야 고정된 스케줄을 받았는데, 받아본 스케줄에 적혀있는 승무원들 명단 중 내가 운항하는 비행기에 Deadhead crew(듀티가 아닌 신분으로 비행기의 승객석에 탑승하는 승무원)로 탑승한다고 적혀있는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훈련생 시절 나와 가장 많은 비행을 했던 담당 교관님이었다.
Deadhead 뿐만 아니라 승무원이 승객처럼 변장을 하여 승객석에 탑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고, 내일 올라가는 비행기에 나의 담당 교관님이 탑승을 하신다. 보고 싶었던 교관님과 무려 6개월 만의 재회였다.
셋째 날, 태풍은 빠르게 제주도를 통과했고 그 영향이 잦아들어 운항하기에 무리 없는 날씨가 되었다. 쇼업시간에 맞춰 호텔 1층에 나갔고 기장님과 나, 그리고 객실 승무원분들은 크루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 브리핑을 하는데 나와 같이 바뀐 스케줄을 기장님 또한 받으셨을 터, Deadhead crew로 적혀있는 나의 교관님 성함을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망고야 스케줄 봤어? 너 예전 담당 교관님 엑스트라 타셨던데?"
"봤어요 기장님. 너무 떨리네요. 교관님 오랜만이라 보고 싶었는데."
"그 비행 너가 할래?"
“이따가 날씨 괜찮으면 제가 혹시 해도 될까요?"
"아이 그럼~”
첫째 날 비행을 하고 내려와 기장님과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수다를 떨 때 내가 감사한 분들 중 한 분이라며 교관님 이야기를 했었기에 기장님 또한 나의 교관님 성함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나에게 비행 너가 하겠느냐는 제안을 해주신 것이다.
비행기에 조종사가 두 명이 타면, 아주 간단히 말해 한 명은 조종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전반적인 상태를 모니터링하는데 기장과 부기장이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그 역할을 나누어서 수행한다. 그리고 이착륙은 보통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조종을 담당하는 조종사가 수행하게 되는데, 위에 기장님께서 말씀하신 '그 비행 너가 할래?'라는 말은 '너가 착륙해볼래?'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기장님들로부터 가족이나 친구, 혹은 신경 쓰고 싶은 사람이 나의 비행기에 타면 오히려 랜딩이 더 잘 안된다는 수많은 구전동화들을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뒤에 타신 담당 교관님에게 좋은 비행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랜딩을 잘 해내서 훈련생 시절 때 똥랜딩을 일삼았던 내가 ‘교관님! 제가 어느덧 이렇게 잘 컸습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비행기에 도착하여 칵핏에 앉아 비행 정보를 입력하고 있는데 공항과 비행기를 연결하는 브릿지로 걸어오는 교관님이 보였다. 왠지 마음이 찡했다. 부기장이 되고 나서 처음 뵙는 거니 6개월도 더 넘었을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와 기내에 탑승하신 교관님은 칵핏으로 들어와 내 어깨를 툭 치시며, 시크하신 교관님 답게 한마디 하고 가셨다.
"오랜만이다."
대성하여 친선경기에서 골을 넣고 히딩크에게 달려간 박지성 선수만이 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아, 아니다.
아직 나는 대성하지 않았으니 좀 다른 경우겠다.
여하튼, 승객의 탑승을 위해 칵핏 문은 닫혔고, 나는 기장님에게 말했다.
"기장님 제주, 김포 날씨 괜찮은데 비행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그럼. 교관님 뒤에 타셨다고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평소대로 편하게 해. 그래야 더 잘돼."
"그래야 하는데 뒤에 교관님 계시니까 뭔가 랜딩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원래 아는 사람 타면 잘 안돼."
"잘 한 번 내려볼게요."
"잘 못 내려도 돼. 괜찮아."
비행기를 부드럽게 착륙시키려고 욕심을 내다보면 아무래도 비행기가 활주로 위에서 부양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지게 되는데, 자칫하다가 그 부양 시간이 너무 길어져 바퀴의 접지가 늦어지면 착륙을 해야 하는 안전거리를 벗어나게 될 수 도 있다. 그리고 착륙해야 하는 거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다시 비행기를 복행 하여 돌아오는 절차인 Go-around를 수행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욕심을 부리다가 되려 불필요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부드럽게만 내리는 착륙이 좋은 착륙이라고 할 수 없다. 정해진 착륙 거리에 안전하게 접지를 하는 것이 좋은 착륙이다. 그리고 안전하게 내리는 와중 조금 더 부드럽게 내린다면 더할 나위가 없고. 심지어 보잉 회사에서 제시하는 랜딩 중 firm landing이라고 하여, 일부로 조금 거칠게 접지를 해서 그 마찰력을 이용해 제동거리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쓰여있기도 하다. 따라서 부드럽게 내리는 건 내 욕심이었다.
제주에서 이륙을 한 우리 비행기는 다행히 기류가 좋아 별 일 없이 순항을 하며 김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공항에 설치된 불빛들은 선명하게 반짝거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 활주로가 보였다. 내가 말했다.
“활주로 식별됐습니다. 오토파일럿 끊겠습니다."
김포 또한 태풍의 영향이 조금은 줄어들었는지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진 않았지만 잦은 진동은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행기가 활주로에 가까워질수록 변덕스러운 바람은 그 세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조종간의 느낌이 좋았다.
스윽,
활주로에 닿은 바퀴의 느낌이 부드러웠다. 안전한 착륙 거리 내에 꽤 부드러운 접지를 했고, 적어도 그날 내가 했던 랜딩은 최근 며칠 사이에 했던 랜딩 중 가장 잘 된 랜딩임은 분명했다. 게이트에 항공기를 주기한 뒤 승객들이 하기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고 곧이어 승객들의 하기가 끝났다는 사무장님의 노크소리가 들렸다. 칵핏 문을 열고 나가니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교관님이 보였다. 교관님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교관님!! 저 오늘 교관님 타셔서 랜딩 엄청 신경 쓴 거 아세요?"
"이거 랜딩을 니가 했다고?"
"아 그럼요 교관님!! 엄청 신경 썼습니다!!”
안 좋았던 날씨에 당연히 기장님께서 랜딩을 하셨을거라고 생각하셨는지 교관님은 좀 놀란 표정을 지으셨지만 그 표정 속에서 '요놈 잘했다.'정도의 느낌을 캐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훈련생 때 맨날 이상한 똥랜딩만 하던놈이 터뷸런스 있는 날에 그나마 봐줄 만한 랜딩을 했으니 놀라실 수밖에. 같이 밖으로 걸어가며 그동안 밀렸던 소식을 업데이트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어느덧 게이트 밖이다.
“휴직 잘 보내고, 연락해."
"그럼요 교관님.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용기를 조금 내서,
"교관님, 사진 한 방...?"
"됐어. 나중에 비행 같이 나오면 그때 찍어."
"넵 ^____^”
두 번째 다짐을 아직까진 잘 지켜낸 것 같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