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고 파일럿 Jul 06. 2021

기장님, 뒤에 온도 좀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


비행기를 타면 객실 승무원분들과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다고 부러워하는 무지몽매한 내 친구들의 헛된 바람과는 다르게, 실제로 부기장인 내가 객실 승무원분들과 수다를 떠는 일은 거의 없다. 낯을 좀 가리는 내 성격 탓이기도 하고, 애초에 수다를 떨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같이 보내지도 않는다. 우선 업무 자체도 다르고 나의 사무실과 객실 승무원분들의 사무실은 총알로도 뚫기 힘든 단단한 문으로 그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 성격 좋은 부기장님은 어색하지 않게 그 사회성을 마음껏 내뿜으실 수도 있지만, 말했듯이 대학생 때 조별과제가 싫어 회계학과를 선택한 어느 사회성 결여된 망나니는 적당한 소음과 다정한 공기로 가득 찬 칵핏에 앉아있는 게 훨씬 편하다. 그래서 객실 승무원분들에게 보통 내가 하는 말은 다음 두 가지가 거의 전부이다.


1. "저는 괜찮습니다."

2. "기내 온도는 괜찮으셨어요?"


첫 번째 괜찮습니다는, 어느 상황에 써도 좋은 말로 커피를 여쭈어봐 주신다거나 필요한 거 없으시냐 여쭈어봐 주실 때 등 아무 때나 써도 어색할 것 없는 마법의 단어이다.


두 번째 문장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보잉 737 기종의 특성상 기내 온도 조절 장치가 칵핏에 있어서 하는 말인데, 보통 첫 번째 레그(노선)가 끝나고 내가 사무장님에게 묻는 말이다.


같은 737이라도 연식에 따라, 비행기에 따라 온도 조절 장치 설정값이 조금씩 상이할 수 있기 때문에 첫 번째 레그의 값을 바탕으로 추우셨다고 하면 다음 레그부턴 조금 더 온도를 따듯하게, 더우셨다고 하면 조금 더 시원하게 설정한다.


여기에서 나의 알량한 자부심이 살짝 들어가는데, 첫 레그가 끝나고 사무장님에게 기내 온도는 괜찮으셨냐고 물어봤을 때, 엄지 두 개를 치켜세워주시면서


"온도 좋았어요 기장님."


이라고 해주시면 그날은 내가 밥값을 해냈다는 기쁨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얄팍한 자부심이 솟구쳐 올라온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부기장님들께서 나처럼 이런 이상한 자부심을 갖고 계신 건 아니니까.


 번은 내가 유난히 기내 온도 조절에 미쳐있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대학생  승객으로 비행기를 탑승하여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을  비행기 온도가 더우면 여행을 시작도 하기 전에 진이 빠졌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아무튼 대충 그때부터인  같다. 온도  시원하게  주실  없을까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는 조별과제 혐오증이 있던 나같이 소심하고 선량한 승객분들을 위해   하나 불살라 온도 조절을  해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던 것은.


기내 온도가 쾌적하다면 왠지 모를 자부심이 드는 내가, 평소와 다름없이 기내 온도 조절에 미쳐서 승객분들에게 쾌적하디 쾌적한 온도를 제공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비행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나의 자부심이 슬픔에 울부짖는 사건이 발생했다.


코로나로 텅텅 비어있던 인천국제공항




필리핀 클락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


기류도 상당히 좋았고 기장님 또한 너무 좋으신 분과 비행을 같이 했던 터라, 화기애애하고 여유롭게 비행을 하며 돌아오고 있었는데 평화로운 칵핏에 정적을 깨는 소리가 울렸다.


띵~


객실에서 칵핏을 부르는 인터폰 소리였다.

기장님께서 인터폰을 들어 대답했다.


"네~기장입니다."

"기장님~ 혹시 기내 뒤쪽 온도 좀 따듯하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무장님이셨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내가 타는 737 기종은 기내 온도 조절장치가 칵핏에 있었기에 순항 중 기내 온도가 조금 덥거나 추우면 객실에 계신 사무장님이나 다른 승무원께서 이렇게 연락을 주시곤 한다. 사무장님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기장님에게 눈으로 끄덕거리는 사인을 보내며 바로 기내 온도 조절장치에 손을 갖다 댔다.


온도 설정은 날씨마다 조금 다르게 하는데, 그날은 더운 날씨였으므로 반팔을 입은 승객들이 많아 온도를 처음 탑승할 땐 시원하게 하다가 갈수록 조금씩 포근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치상으로는 평소보다 조금 따듯하게 했는데도 춥다고 연락이 오니, 승객수가 적어서 좀 추운가 싶어 온도를 조금 더 올렸다.



승객수가 적을 땐 온도를 조금 더 따듯하게 하는 편이다




한 10분여쯤 지났을까,


띵~


칵핏을 부르는 콜 소리가 한번 더 울렸다.


"네~ 기장입니다."

"기장님~ 기내 뒤쪽 온도, 조금만 더 올려줄 수 있으세요?"


내가 설정해놓은 값이 기장님이 보시기에도 충분히 따듯한 바람이 나오는 값이었으므로 기장님도 의문이 들었는지 다시 한번 물으셨다.


"뒤쪽 많이 춥나요?"

"네~ 조금 많이 추운 것 같아요."


따듯하지는 않더라도 '많이' 춥다니, 이 정도 설정이면 추울 리가 없을 텐데.


기내에서 온도를 조절할 때 우리 집에 있는 에어컨처럼 24.5도 이렇게 디지털화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만지는 기내 온도조절장치의 값이 그대로 기내 온도로 직행하는 시스템도 아니다. Pack이라고 불리는 냉각 온도제어장치를 통하여 기내의 온도를 조절하는데 작동 원리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엔진을 통해 압축된 고온고압의 공기가 터빈을 통과하면서 단열 팽창하게 되는데, 단열 팽창된 공기의 온도는 급격하게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영하의 온도로 떨어진 공기를 바로 기내로 보내면 승객들의 코털이 얼어붙을 것이 분명하기에, 다시 이 저온의 공기와 엔진을 통해 압축된 고온고압의 공기를 적절히 섞어서 기내로 내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내가 조절하는 스위치는 저온의 공기에 얼마나 많고 적은 고온의 공기를 섞을지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쯤에서 내가 책 처음에 소개한 전문적인 지식은 철저히 배제한다고 약속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정말 간단히 말하자면, 어떻게 하다가 차가운 공기가 된 녀석들이 기내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대로 들어가면 승객들 얼어 죽으니까 내가 따듯한 공기의 양을 조절해서 적절한 온도의 공기로 만들어 기내로 보내는 것이다. 예전에 지어진 아파트를 가면 샤워기 물의 온도를 조절할 때 오른쪽에 달린 차가운 물 손잡이와 왼쪽에 달린 뜨거운 물 손잡이를 적절한 손놀림으로 적당히 돌려서 따듯한 물을 나오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기내로 몇 도의 공기가 방사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스위치를 조절을 하느냐?

선조들의 지혜라고 들어보았는가. 선조까지 갈 것까진 없지만, 기성 부기장님들께서 펜으로 적당한 공기가 나오는 자리를 표시해 놓은 흔적이 있다. 그 잉크의 흔적을 기준으로 적절하게 조절을 하면 쾌적한 온도의 공기가 기내로 전달되는 것이다. 원시인들이 그려놓은 벽화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던 고고학자들의 희열을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날 내가 탔던 비행기가 연식이 조금 오래된 비행기라 그런가, 아무리 올려도 춥다고 말씀하시는 사무장님의 외침에 온도를 거의 끝까지 올려봤다. 보통의 상황에서 사실 이 정도면 기내가 후끈후끈해야 정상인 값이었지만 많이 춥다는 말에 과감하게 시도를 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와는 별개로 두 번째의 "띵"이 울림과 동시에, 저기 저 깊은 내면의 영역에서 밥값 못하는 부기장의 아이덴티티가 스멀스멀 기회를 엿보며 올라오기 위해 꿈틀대고 있었다.


온도를 가장 따듯하게 설정한 지, 다시 말해 차가운 공기에 고온의 공기의 양을 최대로 방사하도록 설정한 지 10여분쯤 지났을까. 아직 추가적인 연락이 없는 거 보면 지금쯤이면 기내의 온도가 괜찮아졌을 거라는 방심을 하며 밥값 못하는 부기장 아이덴티티를 심연 속의 집으로 돌려보내려는 찰나, 한번 더 공포의 소리가 들렸다.


띵.


세 번째 띵이 울림과 동시에 심연 속에서만 헤엄치던 밥값 못하는 부기장 아이덴티티는 탄력을 받아 내 머리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와 나를 뒤덮기 시작했다.


콜이 울림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기장님께선 손을 인터폰에,

나는 손을 온도조절장치에 갖다 댔다.


"네~ 기장입니다."

"기장님, 정말 죄송한데 뒤쪽 기내 온도 더 올려주실 수 있나요?"


사무장님께서 죄송할 일은 없었다. 죄송하다면 밥값 못한 나와 내 마음도 몰라주는 이 비행기의 에어컨 시스템이 죄송하다 해야지.


"지금 최대로 따듯하게 했는데도 춥나요?"

"네 기장님 뒤쪽 바람이 너무 차갑게 나와요."


하지만 이미 최대로 올려버린 온도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기장님께서는 사무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터폰을 마쳤다.


이제 칵핏에는 두 명이 앉아있다.


좋으신 기장님과

밥 값 못하는 부기장.


우선 시스템이 고장이 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야 할 비상조치는 없다. 그렇다고 고도를 내리자니 연료 효율이 떨어져서 안된다. 참, 고도를 낮추면 연료 효율이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고도가 낮을수록 공기가 많고, 공기가 많을수록 그게 맞게 연료를 더 많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승객을 앞쪽으로 모시는 방법이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좌석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다.


밥값도 못하는 이 무지몽매한 부기장을 하늘이 가엾게 여겨서였을까. 마음속 통곡의 외침이 관제사에게 닿았는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 하강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날 나는 집에 가서 비행 노트를 펼쳐 들고 일필휘지로 적어내려 갔다.


‘XXXX 기번 항공기 : 고도 높아지면 온도 높일 것(아주 그냥 최대한으로다가)’

작가의 이전글 바닥으로 추락해버렸던 '조종사 친구'의 명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