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에 다녀왔던 아프리카 여행도 혼자였고
스물다섯에 다녀온 히말라야 여행도 혼자였다.
스물네 살부터는 혼자 나와서 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취미도 엇비슷한 걸로 땡기게 되었다.
이를테면 집 근처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는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아니면 혼자 맛집을 간다든지, 혹은 여행을 간다든지.
그나마 사람과 좀 부대낄 수 있는 취미라곤 헬스장을 가는 일이었다.
헬스장을 가면 참 웃긴 게, 같은 짐(GYM)에 오래 다니다 보면 지속적인 출석에 오다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중 자주 마주치는 사람은 비록 인사는 안 하지만 낯이 익어 괜히 반갑다.
'저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길래 맨날 11시 반에 오지? 나처럼 백순가?'
그러다가 같은 시간에 안 보이면 괜히 걱정된다.
'아저씨가 왜 안 보이지? 혹시 무슨 일 있나?'
사실 올해 초에 한동안 한참을 마주치다가 어느 순간 안 보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물론 인사는 안 하는 사이었고 어쩌다 눈을 마주쳐도 서로 어색하게 피할 뿐이었다. 아, 생각해보니 그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딱 한번 있었다.
"혹시 이거 원판 다 쓰셨어요?"
"아 네네, 가져가셔도 돼요."
아무튼, 비슷한 시간대에 자주 마주쳤었는데 며칠 동안 안보이니 혹시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다가도 몇 달 동안 안 보이니 다른 곳으로 짐을 옮겼겠거니 생각했다.
하루는 일찍 일어나게 돼서 아침에 바나나 두 개를 먹고 힘을 내어, 조금 이른 시간에 헬스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 7시 반쯤 도착했나, 한산한 짐에 비어있는 랙을 하나 잡고 운동을 하는데 거울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 아저씨였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아저씨!!" 하며 인사할 뻔했지만,
우리는 모르는 사이니까...
아련한 마음 한 켠 부여잡고 나머지 스쿼트를 하는데 거울 뒤로 비치는 그 아저씨 허벅지의 데피니션이 더 좋아진 게 보인다.
'새벽에 나와서 열심히 운동하셨구나.'
미국이었으면 냅다 달려가서
"헤이 브로, 왓 해픈 투 유어 레그 맨. 잇츠 쿨 브로."
했겠지만 여긴 한쿡이니..
일단은 조금 참고 나중에 또 마주치거든 단백질 보충제 한잔 하면서 서로 스쿼트 스팟이나 어때요 물어볼 요량이었지만 그런 나의 꿈은 내가 홈짐을 차린 이후 처참히 무너져버렸다.
사실 홈짐의 장점은 너무 많지만, 몇 없는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공간의 정기 출석을 막았다는 것에 있어서는 엄청난 단점이었다. 사실 이쯤 되면 뭐 거의 세상과 단절되는 삶을 사는 수도승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요즘 들어 부대끼며 아등바등하는 것에 조금 지쳐서 그럴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했던가, 쉴 때도 혼자 쉬는 게 편해진 버릇이 비행기를 탈 때도 어김없이 발현되고 있었다.
비행 중 어느 날,
오후 7시 41분의 하늘.
세 개의 레그를 마치고 마지막 레그를 하기 전, 비행과 비행 사이 뻥 타임이 조금 길어 칵핏에 앉아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보며 쉬고 있었다. 이따금씩 내리는 비에 노을도 적당히 지고 있겠다, 밖에 풍경도 예쁘겠다, 다음 비행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도 있겠다, 미리 가져온 책을 꺼내서 읽어야겠다 싶었다.
비행기 외부 점검 끝내고 오신 기장님께서 내 모습을 보시더니 하시는 말씀,
“밖에 나와 쉬어요. 왜 불편하게 안에 앉아 있어.”
“기장님, 아직 쭈구리라 그런지 전 여기가 훨씬 편합니다.”
“쭈구리가 뭐야 ㅋㅋㅋ”
사실 칵핏 의자가 승객분들 의자보다 더 크고 각도 조절도 자유롭고, 칵핏이 적당히 어둡고 아늑하고 코지 한 게 뭔가 포근한 느낌이 있어서 나 같은 쭈구리에겐 안성맞춤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칵핏의 오른쪽 좌석은 나만의 공간이니까, 이곳이 편하게 느껴지는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무튼 시간을 보니 아직 다음 비행까지 시간이 조금 많이 남아 읽으려고 가져온 박정민 배우가 쓴 ‘쓸만한 인간’ 책을 꺼냈다.
고여있는 빗물이 불빛들에 반사되는 어스름 빛 도는 공항,
적당한 등불들 앞에 두고 재밌는 책을 읽으니 너무 좋았다.
그리고 마침 그날이 3년 만에 희귀한 슈퍼 블러드 문이 와서 환상적인 우주 쑈가 펼쳐지는 날이라고 했는데,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김포로 올라가는 스케줄이니 어쩌면 남들보다 조금 더 가까이서 그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고 있었다.
책도 재밌고
풍경도 재밌고
의자도 편하고
슈퍼 블러드 문도 나를 기다리고 있고
완전 꿀잼인 상황이라
뭔가 이 분위기를 나만 알고 있기가 미안해서 언젠가 죽기 전에 내가 책을 냈을 때 독자분들에게 이 낭만을 꼭 전하리라 다짐하고 책 제목도 얼추 '쭈구리의 공간' 정도로 해가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막 사인을 휘갈겨주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와중, 칵핏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부기장님 눈 나빠져요”
비행기를 점검하러 와주신 정비사님이었다.
“괜찮아요 정비사님 ㅎㅎ 루테인 열심히 먹고 있어요”
“그것도 눈이 좋을 때 먹어야지, 한번 나빠지면 안 돼요~”
책 한번 읽다가, 정비사님 이야기 한번 들었다가 하며 이런저런 스몰 토킹으로 그렇게 정비사님과 가벼운 수다를 떠는데, 정비사님께서 상해에서 4년을 근무하셨다는 말씀에 책을 내려놓고 정비사님에게 말씀드렸다.
"정비사님! 저도 어렸을 때 칭따오에서 3년 살았어요!"
“그럼 중국말 좀 하세요?”
“아이 그럼요. 워 이치엔 쭈 짜이 쭝궈더 싈호우(=내가 예전에 중국에서 살았을 때)”
“오우 발음 좋으시네.”
“사실 저게 끝이에요. 초등학생 때 다녀와서."
사실 정말 기억나는 중국어가 저게 거의 전부였다.
언어는 안 쓰면 까먹는다더니, 나는 온몸으로 그 문장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그렇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정비사님과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여전히 같은 페이지에 내 검지 손가락이 들어간 채로 책은 접혀있었고, 책 보다 더 재미있는 정비사님과의 수다가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오랜만에 사람 냄새나는 대화, 나도 무의식 중에 그런 것들이 그리웠나 보다.
"근데 오늘 날씨가 많이 안 좋네요. 밖에서 작업하는데 불편하지 않으세요?”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죠 뭐.”
비행기가 출발하기 40분 정도 전인데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구름도 소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날씨가 계속 지속된다면 환상의 우주 쑈 슈퍼 블러드 문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풍경 미치광이인 내가 그 이벤트를 놓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메어왔었는데 정비사님 말마따나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3년 후에 또 온다는데 그때 다시 도전하면 되니까 말이다.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고 이륙시간에 맞춰 비행준비를 마쳤다.
다행히 김포 가는 길에 구름이 많이 걷혔다. 김포 기상을 뽑아보니 시정이 맑고 구름이 없다고 나와있다.
기상을 보신 기장님께서,
“김포 날씨가 좋은데요?”
“날이 좀 걷히나 봐요 기장님. 밖에 구름도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문득 생각 난 블러드 문,
칵핏 창문 오른쪽 뒤를 돌아보니 달이 떠있다.
음... 근데 내가 늘 보던 하얀색이다.
블러드 문이면 빨간색 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려와서 확인해보니 오후 8시 9분에 시작해서 오후 8시 18분에만 관측이 된단다.
그리고 내가 비행했던것은 9시도 훌쩍 넘은 시간.
이런 망ㅎ....
그래,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뭐.
그래도 좋은 도시 불빛이라도 봤으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