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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님과 내가 우리 회사에 뽑힐 수 있었던 이유

by 망고 파일럿


어제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 6화를 보는데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어느 한 젊은 의사가 특정 환자에게 더 신경을 쓰는 장면이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환자의 고향이 그 젊은 의사 본인의 고향과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어진 장면에서는 그 모습을 본 교수가 자기 또한 젊었을 때 이름이 같거나 나이가 같은 환자에게 괜히 더 애착이 간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었다. 또 드라마 중 후반부 어떤 장면에서는 환자의 이름이 의사 본인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환자에게 사망선고를 차마 내리지 못하고 감정에 북받쳐 올라 울먹이는 의사의 장면도 연출됐다.


내가 이 부분에서 참 공감이 갔던 이유는, 나 또한 생판 남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공통점이 생기면 왠지 모를 정감이 더 느껴지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지에서나, 일터에서나 혹은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대화의 물꼬를 틀기 가장 적당한 것은, 나에게 있어선 그들과의 '공통점'이었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 큰 소질이 없는 나 조차도 공통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사람들과의 대화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대화 사이사이에 있을만한 단절들이 꽤 줄어들고 보다 매끄럽게 이야기를 이어간다고 해야 하나, 상대방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도 좀 생기는 것 같고 괜히 친한 사람 같고 농담도 좀 하고 싶고,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이.. 이새ㄲ 뭐지? 왜 이렇게 친한척하지?'


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긴 하지만, 뭐 일단은 그 시간들이 즐거웠었으니 아무렴.



어쨌든,

'회계학과 나온 조종사'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매번 다른 기장님과 비행을 하며 기장님들께서 본인을 소개해 주실 때 내가 귀 기울여 듣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기장님의 경험과 나의 작은 경험 사이에 사소한 공통점이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기장님도 계셨고, 내가 살고 있는 아랫집을 구매하려고 알아보신 기장님도 계셨고, 내가 미국에서 비행했던 곳의 Safety pilot으로 지냈던 조종사와 친분이 있는 기장님도 계셨다.


이렇게 형태가 뚜렷한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기장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취향이나 취미들이 비슷하여 친해진 기장님도 있고, 기장님의 경험이 너무 재밌어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기장님의 이야기에 빠져 내가 스스로 팬을 자처한 기장님도 계셨다.


근데 참 신기한 건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기장님과도 공통점이 생기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같은 기장님과 두 번째 비행이 있을 때이다.


이때 우리는 '한번 같이 비행해본 사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가뜩이나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직업 특성에도 이따금씩 반가운 얼굴을 뵐 때가 있다.


얼마 전,

1년 2개월 전쯤인가, 아무튼 어디를 같이 다녀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얼굴만은 서로 기억을 하는 기장님과 비행이 나왔다. 그 기장님과 어느 겹치는 공통점은 없었지만 같이 했던 비행이 즐거웠기에 이번 스케줄이 나왔을 때 기장님의 성함을 보고 '어?' 하며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비행 당일, 브리핑실에서 기장님을 뵀을때 서로,


기장님 - "어? 우리 비행했죠?"

나 - "네 기장님 ㅎㅎ 1년도 더 전에 같이 한번 국내선 다녀온 것 같습니다."

기장님 - "맞아요. 기억나요. 잘 지냈죠?"

나 - "네 기장님 그럼요. 기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기장님 - "아이 그럼요."


라는 대화로 우리의 공통점을 다시금 확인하기도 했다.



기장님과는 제주를 다녀오는 스케줄이었는데, 첫 번째 레그(노선)를 끝내고 두 번째 레그와의 그라운드 타임이 조금 길었던 터라, 기장님과 그동안 밀린 근황과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사실 기장님과 섞이는 공통점은 없어도 같이 비행 한번 해본 사이라는 공통점으로도 괜히 반가운 마음도 더 들고, 서로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하는 와중 나의 얼굴이 좋아졌다는 기장님의 말씀에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겸손을 떨고 있는데 기장님께서 갑자기,


기장님 - "사실 예전에 저 뽑을 때는 조종사 얼굴만 보고 뽑았어요."

나 - "ㅎㅎ..ㅋㅋ, ㅎㅎㅎㅎ"

기장님 - ㅋㅋㅋ..ㅎㅎ..ㅋㅋ"


그렇게 둘이 이상한 웃음으로 한참을 웃다가 내가 기장님에게,


나 -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기장님. 왜냐하면 저 뽑을 때도 아직도 얼굴만 보고 뽑고 있었거든요."

기장님 - "ㅋㅋㅋㅋㅋ..."

나 - "ㅋㅋㅋㅋ..ㅎㅎ.ㅋㅋㅋ"


승객분들이 계시지 않아 물론 칵핏 문은 열려있었지만, 뒤에 계신 사무장님께서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하신 것 같아 매우 다행이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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